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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도 지역 교육청 단위의 교육과정 연수가 한창이다. 2009 개정 교육과정 연수를 받은 때가 엊그제 같은데, 다시 또 새 교육과정이 시작된단다. 우선 국영수와 한국사, 사회, 과학 등 기초교과 담당 교사들을 대상으로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총론과 주요 내용을 설명하는 자리다. 2018년 적용을 앞두고 있는 새 교육과정을 이해하고, 교과별 교수학습 및 평가 개선 사례 등을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은 학생 참여수업을 활성화시키고 결과보다는 과정 중심 평가를 강화함으로써 '바른 인성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취지다.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핵심 역량을 설정하고, 기존의 문이과를 통합하며, 학습 내용을 적정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문이과 통합을 제외하면, 이전의 교육과정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게 현장의 대체적인 평가다.

교육부는 이러한 연수를 올해부터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전면 실시될 2020년까지 지속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라며, 학교 현장에 안착될 수 있도록 교사들의 이해와 협조를 당부했다. 하지만 핵심 역량을 학생부에 어떻게 기재해 평가할 것인지 모호하고, 통합사회와 통합과학 등 신설된 공통 과목에 대한 수능 출제 여부조차도 정해지지 않아 혼선과 갈등이 불가피해 보인다. '말의 성찬'일 뿐,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인식마저 팽배하다.

"선생님들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연수를 시작하기 전 강사가 교사들에게 던진 말이다. 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뜻일 테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새 교육과정에 군말 없이 따르라는 말이기도 하다. 교육과정은 흠잡을 데 없는데, 그걸 현장에 적용하는 교사들이 문제라는 의미일까. 변화를 거부하는 교사들의 구태의연함에 내려치는 죽비로 이해한다지만, 지금껏 이 땅의 교사들을 그렇게 만든 교육부의 상명하달 관행에 대해선 왜 문제 삼지 않을까.

"꿈쩍이지 않는 학벌구조와 대학입시를 탓하기 전에, 우리가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새 교육과정을 통해 중고등학교의 교실 수업이 개선된다면 대학과 사회의 변화도 차츰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듣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물론, 새 교육과정에 대한 그의 진심과 교육적 열정을 믿어 의심치는 않지만, 곳곳에서 공교육 붕괴를 한탄하는 마당에 지나치게 나이브하고 편협한 현실 인식이다. 온존한 학벌구조 속에 대학입시가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교육과정까지 좌지우지하는 현실에서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혹시 어쩔 수 없다는 자괴감에서 나온 '아재 개그'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 교육과정이 '도깨비 방망이'라고 맹신하지 않는다면, '신상품'이라며 툭 던져놓기 전에 조금 더디더라도 교사들이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도록 현장에 대해 헤아려보는 노력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개정의 배경과 방향, 내용까지도 작금의 교육 현실을 나름 반영한 것이니 무작정 몽니부릴 일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미사여구'로 치장된 내용들마다 '현장'이 빠져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답은 현장에 있는데 말이다.

'개돼지 교육과정'으로 불리는 이유

조금 억울할지는 모르지만, 2015 개정 교육과정도 '별명'이 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최순실 교과서'라고 조롱하듯, 일부에서는 새 교육과정을 두고 '개돼지 교육과정'으로 낙인찍어 부른다. '뜬 구름 잡는' 교육과정을 살펴보다보면 "민중은 개돼지"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라고 했던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발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우선, 새 교육과정의 인재상으로 명명한 '창의융합형 인재'란 어떤 사람일까.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고 다양한 지식을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이로 규정했다. 이것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미래 역량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해도, 흔들리는 우리 공교육의 현실을 떠올리면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누군가가 그토록 강조했다는 '엘리트 한 사람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의 공교육 버전 아닐까 싶은 의심마저 든다.

학교에서 대놓고 '소수 엘리트 교육'을 할 게 아니라면, 창의융합 운운하는 건 참으로 민망한 언사다. 지금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극심한 양극화다. 성적분포를 봐도 '중산층'이 사라졌다. 명문대를 향해 밑도 끝도 없는 경쟁을 벌이는 상위권과 애초 공부에 담 쌓은 채 학창시절을 통째로 허비하는 하위권, 오직 두 부류뿐이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긴 지는 이미 오래고, 아예 교육이 신분 세습을 고착화시키는 합법적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심미적 감성 역량을 키우기 위해 독서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건 어떤가. '독서'가 '교육'을 만나 '평가'될 때 어떻게 변질돼 왔는가는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독서이력을 어떻게 성적에 반영할까 고민하기보다, 차라리 야간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없애고 하교 시간을 앞당기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다. 교육을 말하기 전에, 주말도 방학도 없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거나 연극과 영화를 보러 다닐 시간부터 보장하는 게 먼저 아니겠는가.

심미적 감성 역량, 곧, 학교가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과 감수성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것도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요즘 아이들은 결코 학교에서만 배우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학교 안에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 학교 밖에서의 배움이 훨씬 더 넓고 강력하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보듯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의 공감 능력이 저 지경인데 무슨 얼어 죽을 감수성 교육이냐는 아이들의 조롱이 이미 차고도 넘친다.

중점 사항이라고 강조했지만, 학습량을 적정화하겠다는 방향도 하나마나한 소리다. 내용인즉슨 국영수의 비중을 낮추는 한편, 교과별로 핵심 개념과 원리 중심으로 가르쳐 학습량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표현만 다를 뿐, 이 또한 전가의 보도처럼 읊어온 이야기다. 대학입시가 국영수 중심으로 짜여있는 마당에 이수 단위를 낮춘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닐뿐더러, 그나마 학교마다 자율적으로 증감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니 껍데기만 남을 게 불 보듯 뻔하다.

지난 수차례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줄여준답시고 시행된 것이 바로 교육과정상 문이과 과목 구분과 수능에서 탐구영역 응시 과목 수의 축소였다. 과문한 탓인지, 그래서 아이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명문대 진학을 위한 무한 경쟁이라는 근본 원인은 그대로 놔둔 채 시험 과목을 줄이면 해결될 것처럼 떠들더니, 이름만 그럴듯하게 포장했을 뿐 결국엔 손바닥 뒤집듯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 셈이 됐다.

물론, '원상 복구'된 건 그뿐만 아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정보화 사회와 컴퓨터'라는 과목을 학교에서 퇴출시킨 게 지난 교육과정에서인데, 다시 '소프트웨어 소양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새 교육과정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심지어 중학교에서는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다. 말이야 컴퓨팅 사고력을 함양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교육부의 무능과 조변석개하는 우리 교육과정의 천박함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언제나 그랬지만, 교육부가 내놓는 교육과정은 글귀만 놓고 보면 하나같이 노벨상감이다. 말 꾸미는 것에는 달통한 사람들 같다. 그러나 대통령만 구중궁궐에 사는 게 아니라, 고위 공직자들 또한 현장과 괴리된 채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똑같은데, 해석과 진단은 하늘과 땅 차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교육과정의 변화에 별 기대를 하지 않는 이유다.

창의융합형 인재? 누가 뜻풀이 좀 해주세요

연수 시간 내내 교사들은 하나같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연수가 시작되기도 전, 아이들까지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는 마당에, 교육과정 개정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탄식이 쏟아졌다. '창의융합형 인재'라는 것도 경제학자들조차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창조경제'의 교육 버전 아니냐며 조롱이 오가기도 했다. 대통령이 이미 권위를 상실했고, 정부의 신뢰가 무너져버린 상황에서 새 교육과정이 멀쩡할 리 없다.

더욱이 2018년부터 순차적으로 적용한다는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린 채, 한국사 교과만은 내년부터 곧바로 적용된다는 예외 규정을 뒀다. 때문에 2017년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라는 걸 염두에 둔 조처가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어떻든 이는 새 교육과정에 대한 불신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정치적 중립이 엄격하게 요구되는 교육과정조차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경호하고 배려하는 도구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창의융합형 인재'와 핵심 역량 운운하는 새 교육과정에 대해 연수에 참가한 교사들은 '엉뚱한 반문'으로 맞섰다. 마치 새 교육과정에 항의라도 하듯, 각자 손 팻말을 높이 들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사 국정교과서는?'


#2015 개정 교육과정#창의융합형 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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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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