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 때 세계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김물길은 2년 반 동안 일해서 모은 여행 경비 2500만 원을 들고 스물네 살 때인 2011년 12월, 아시아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중동, 유럽, 중남미 46개국을 돌았다. 처음 계획은 1년이었지만 그 여정을 10개월 더 연장했다. 계기는 대학교 해외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다.
"여행을 좋아하는 대학생은 아니었는데 외국으로 한번 나가보고 싶기는 했었어요. 집안 형편이 넉넉한 게 아니니까 경험 없이 지내고 있다가 학교에서 하는 해외 봉사활동 프로그램이 있어서 신청했는데 운 좋게 된 거예요.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고 그때 외국인 친구들과 보낸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나도 외국 다니면서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겠다', '외국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면 너무 좋겠다' 여행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꿈을 가지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서 여행 경비를 모았죠."그의 꿈은 화가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을 그렸다. 여행하면서도 틈틈이 블로그에 글과 그림을 올렸다. 블로그 이웃인 출판사 편집자의 눈에 띄었다. 그래서 출간한 책이 그림과 글을 묶은 여행에세이 <아트로드>(2014년 7월 출간)다. 그 후 그의 인생은 다채로워졌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강연과 전시회 뿐만 아니라 TV에 나가서 여행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작년 7월과 8월 한국을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 그 여정은 겨울 방학에 다시 이어져 올해 5월까지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다녔다.
당진, 서산, 나주, 장흥, 포항, 통영, 진주, 거제도, 외연도, 울릉도, 독도 등 한국의 여름과 겨울을 그렸다. 지난 8월에 출간한 <아트로드, 한국을 담다>(2016년 8월 출간)에 그 이야기와 그림을 담았다. 여행을 떠날 때 여행에 관한 조언과 이야기를 듣지 않고 떠나는 게 제일 좋다는 김물길을 지난 5일 '아트로드, 한국을 담다' 전시회에서 만났다.
할머니가 불러주신 이름 '물길', 이후 필명으로 사용
- 필명을 김물길로 지은 이유가 있을까요?
"본명인 수로가 한자로 물 수, 길 로를 써요. 한글로 하면 물길인데, 세계 여행 중인 스물다섯 살 때 할머니께서 제게 편지를 써주셨어요. '수로니까 물길이지 졸졸 흐르다가 너무 추우면 할미가 해님이 되어줄게' 적어주셨는데 너무 감동을 받고 잊을 수가 없어서, 할머니가 저를 불러주신 물길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 세계 여행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던 게 있나요?"준비했던 것은 사실 없었어요. 여행 정보를 수집한 것은 없었고 돈을 모으는 것과 부모님 허락을 받는 일이 저에게 가장 큰 거였어요.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도 부모님이 끝까지 허락을 안 해주셔서 중간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여행을 혼자 한 달 정도 하고 왔어요. 그 모습을 보시고 부모님이 마지못해 허락을 해주셨죠."
-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어떤 것 같아요?"사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했지?' 생각이 들기는 해요.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었기 때문에 돈을 모으고 고생할 것 다 하면서 치열하게 여행을 했었는데, 좋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던 경험을 하고 오니까 '지금 만약 그 마음을 가졌으면 내가 과연 떠날 수 있을까?' 마음도 들어요.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한 것 같아요. 다음에는 갈 수 있을 거야 했을 때 다음이 지금일 거 아니에요? 지금이라면 무모하게 갈 수 있을까 하면 바로 예스가 안 나올 것 같아요. 뭣 모를 때 가길 잘했다 생각도 들어요.(웃음)"
- 그림과 글을 묶어 출간했는데, 당시 그러한 목표를 갖고 시작한 것이었나요?"책을 낸다는 것은 상상한 적도 없었고 그냥 '건강히 살아서 돌아오자'가 가장 큰 목표였어요.(웃음) 여행지를 갔다 와서 일주일에 하나 정도씩 블로그에 올린 것을 보고 계신 분이 출판사 직원이었어요. 그래서 연결이 되었죠."
- 다녀오고 난 뒤, 생각이나 삶이 어떻게 변했나요?"많이 변했어요. 제가 여행을 가기 전에는 강연과 방송을 하고 전시를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 했어요. 다녀와서 책을 내고 전시할 기회가 생기고 또 제 이야기를 제 입으로 듣고 싶어 하는 분들이 생겨서 강연과 방송을 하게 되었어요. 굉장히 신기한 경험들은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죠. 만약 여행을 떠날 때 끝나고 나서 책을 내고 전시를 하고 방송을 할 거야 마음을 갖고 떠났다면 저는 이렇게 여행을 못 했을 것 같아요. 오로지 본질적인 것에 대해 집중을 하고 여행을 해서 '감사할 일이 있구나' 생각을 하면서 그때 과거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해외 여행 그림은 일러스트 느낌, 국내 여행 그림엔 스토리가 담겨- 충남 당진을 시작으로 국내 여행을 다녀왔어요. 한국과 세계 여행을 비교하면 어떻게 다른가요?"엄청 다르죠. 외국은 사실 어디를 가도 신선해요. 카페에 가도 외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렘을 줘요. 한국은 모든 게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익숙함과 편안함이 같이 존재하더라고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평범할 수 있는 풍경도 역사적인 면과 스토리를 알아서 한국인 고향의 감성으로 보게 되잖아요?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세계 여행할 때 그린 그림과 한국 여행할 때 그린 그림이 굉장히 달라요. 일부러 다르게 그리려고 한 것은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 어떤 식으로 다른가요?"해외를 여행할 때는 제가 그 깊이를 잘 모르잖아요? 정말 순간의 영감을 받아서 그림을 그리는 거죠. 세계 여행 그림이 작고 일러스트적인 한 이미지로 끝났다면 한국 여행 그림은 스토리를 알고 오래 익혀서 진하게 우려내는 느낌으로 그리다 보니까 그 안에 숨어 있는 스토리가 담기더라고요. 조금 더 풍성해지는 것 같아요."
- 각 여행지에서 마주한 풍경과 사람들을 그렸어요. 그림을 그릴 때, 주요하게 여기는 지점들이 있을까요?"저는 어떤 대상을 좋아해서 집중해서 보는 것은 아닌데, 사람이든 풍경이든 동물이든 다 살아있다 생각하고 그리거든요. 수풀이 살아있다면, 산이 숨 쉬고 있다면, 바위가 사람 같다면 의인화해서 그린 게 많아요."
그림통, 화구, 종이까지 들고 대중교통 이용하는 게 힘들어- 어머니와 여행을 가기도 했었죠?"처음 여행지였던 충남에서는 엄마의 모교 중학교를 처음 갔어요. 제주도도 같이 다녀왔고요. 마지막에는 포항이요. 세 번 정도 같이 여행을 했어요. 단 둘이 국내 여행을 해본 적은 별로 없었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엄마와 여행을 하니까 훨씬 더 여행의 의미가 깊어지더라고요."
- 한국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을까요?"배 타고 섬 들어가는 것을 좋아해서 섬 여행을 많이 했어요. 보령에서 2시간 정도 배 타고 들어가면 서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이 외연도예요. 4박 5일 정도 지내면서 그 섬에 있는 아이들 이름도 모두 외우고 이장님과도 친하게 가족처럼 지냈어요. 섬사람은 거칠고 투박할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은 정을 느껴서 그때 이후로 섬 여행을 많이 다녔던 것 같아요."
- 애로 상황이 있었다면?"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그림통, 화구, 종이, 여행가방까지 들고 다녀야 하니까 추우면 추운 대로 다 감당을 해야 해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 세계 여행 중에는 그 나라의 재료로 그렸다고 했는데요."이번에는 아니었어요. 세계 여행할 때 모든 게 새롭고 그때그때 재료를 구입할 수 없는 여건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현지 재료를 썼어요. 아쉬운 게 그렇게 하다 보니까 오래 보관이 안 되는 거예요. 얇은 종이, 안 좋은 재료를 쓰다 보니 추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데 금방 색이 변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이번에는 더 좋은 재료를 써서 추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더라고요. 준비를 해서 가지고 갔죠."
- 달력에도 그림을 그렸던데요."인도 문방구에서 파는 수채화 같은 것을 사용했어요. 조금만 문질러도 색이 날아가는 단점이 있었는데 여행의 느낌이라서 만족했어요. 근데 이번에는 보완하고 싶어서 재료를 준비했죠."
안 되는 이유보다 되는 이유에 집중하면 용기 생겨
- 여행 중에 그림을 그리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제 여행은 되게 느려요. 여기 보고 다음에 저기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봤던 것을 그려야 하니까요. 십 분 이십 분이 아니라 몇 시간이 걸리니까 여행 호흡이 굉장히 느리죠. 그래서 세계 여행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느리게 여행을 했고 한국 여행도 그랬던 편이에요. 함께 그리는 사람이 있다면 같이 여행을 해보고 싶기는 해요."
- 신간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나요?"<아트로드>는 세계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읽는 게 아니라서 그 지역을 객관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하는 부분도 있어야 했어요. 너무 제 감정적으로만 쓰면 공감이 안 될 것 같아서요. 한국 여행(<아트로드, 한국을 담다>)은 누구든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곳이니까 정보보다는 다분히 제 감정을 담았어요. 조금 더 감성적인 것 같아요."
- 화가가 꿈이잖아요?"짧게만 생각하면 조급할 텐데 저는 평생 그림을 그리고 살고 싶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흘러오는 일들도 결국에 그 중심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하면서 다른 데로 새지 않게 긴장을 하고 있어요."
- 어떤 점을 염두에 두고 여행을 가면 더 알차게 다녀올 수 있을까요?"안 듣고 가는 게 제일 좋은 조언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예를 들어 여행가는 동생에게 이야기할 때 '여기를 보고 이런 것에 집중해서 보고 어디 가면 뭐를 꼭 보고' 이런 조언을 하지 않는 편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꼭 봐야 할 것 같고 안 보면 내가 잘못한 것 같고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내가 안 느껴지면 뭔가 아쉽고 그러잖아요? 쉴 수 있으면 쉬고 고생하고 싶으면 고생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는 게 가장 좋은 조언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역사적인 이야기를 알고 싶겠지만 평가나 조언은 많이 안 듣고 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꼭 한번은 해볼 만한 것 같아요. 경험이 중요하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잖아요? 여행은 그 많은 경험을 압축해서 할 수 있는 것 같더라고요. 혼자 고생도 해보고 혼자 이루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겪으면서 그 안에서 나를 찾는 과정이죠. 몇 년에 걸쳐서 할 경험을 몇 달 안에 할 수 있어요. 짧게라도 떠나는 것을 추천하죠.
혼자 세계 여행을 떠날 때, 모든 주변 사람들이 반대했어요. 어떤 일을 선택할 때 안 되는 이유부터 먼저 생각하니까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당시에 그림을 그리고 시야도 넓히는 이유는 하나였지만 정말 중요하다 생각했거든요. 다녀왔고 찾았고 만족스럽게 생활하고 있는 게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 어떤 상황이든지 안 되는 이유에 집중하지 말고 되는 이유에 집중해서 선택하면 앞으로 훨씬 더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자신을 믿고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기죠. 생활의 방향을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여행지를 추천해주겠어요?"영월이 되게 좋았어요. 동강이 흐르잖아요? 물이 있으면 그 주변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죠. 여름에는 래프팅하는 것도 좋고, 겨울에 가도 너무 좋은 풍경 있고요. 먹거리도 빼놓을 수 없어요. 맛있는 게 많거든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10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