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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공포가 전국을 뒤덮고 있던 2015년 6월 15일 밤 9시.

엄마와 아버지는 미국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다시 부산까지,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쳐 20여시간이나 이어진 긴 여정에 지친 얼굴에 메르스 방지용 마스크까지 껴서 더 초췌해보이는 모습으로 김해공항 게이트에 들어섰다.

1987년 4월 15일. 이제 막 스무살이 된 막내 동생과 함께 세 식구가 이민가방 몇 개를 끌며 김해공항을 떠난 지 28년 만에, 또 다시 이민가방 몇 개를 끌며 잠시 다니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돌아오신 것이다. 고국으로.

그날 밤, 엄마가 싸들고 온 이민가방에 들어있는 짐들은 정말 가관이었다. 웬만한 장독 크기 플라스틱병에 가득 된장과 고추장을 비롯해 고추를 쪄서 말린 고추부각 한 포대, 무를 채 썰어 말린 무말랭이까지. 이건 뭐 미국에서 온 짐이 아니라 어디 우리나라 시골에서 온 짐 같기만 했다.

엄마는 미국  LA에서 그렇게, 된장과 고추장을 손수 담그고 고추를 튀겨 부각을 만들고 무를 썰어 무말랭이를 만들며 한국에서보다 더 한국적으로 살았다. 28년 동안.

그런데, 진짜 보물은 며칠 뒤 한국과 미국, 태평양을 건너 1만km를 날아온 이삿짐안에 있었다. 바로 한 자 한 자 손으로 직접 필사를 한 금박성경이었다.

엄마가 쓰신 필사성경 천 페이지를 직접 쓰신 엄마의 필사성경
엄마가 쓰신 필사성경천 페이지를 직접 쓰신 엄마의 필사성경 ⓒ 추미전

 필사 성경
필사 성경 ⓒ 추미전

 성경을 앞에 두고 필사중인 엄마의 노트
성경을 앞에 두고 필사중인 엄마의 노트 ⓒ 추미전

양 손으로 들어올려야 겨우 들 수 있을 만큼 무거운, 대형 사전만한 크기의 성경은 모두 4권이었다. 성경 한 권의 속지가 대략 천 장, 반듯하게 정자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면 한 장을 메우는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2시간. 정성 들여 한 자 한 자 쓰다가 한 글자라도 잘못 되면 컴퓨터가 아니니 커서로 지울 수도 없고 그 종이를 버리고 다시 썼다고 한다.

내가 받은 성경 앞 장에 적혀 있는 날짜를 보면 2008년 9월 20일에 쓰기 시작해서 2010년 1월 5일에 마쳤다고 적혀 있으니 이 한 권을 완성하는데 1년 6개월이란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렇게 미국에서 엄마가 쓴 성경이 전부 6권. 엄마는 한 자 한 자 성경을 써내려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1987년, 아직 어렸던 나는 인생에선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 종종 일어남을, 분명히 내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내 뜻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님을 알지 못했다. 위로 딸 셋을 낳은 뒤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을 잃은 뒤 엄마는 앞뒤 아무것도 재지 않고 단호하게 이 땅을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

나는 이민이라는 부모님의 선택에 동조하지 않으며, 결혼한 언니와 한국에 남는 길을 택했고 법적으로 아직 미성년이던 여동생은 엄마와 함께 이민길에 올랐다. 해외를 오가는 것이쉽지 않던 시절, 엄마와 아버지, 동생은 생애 처음 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비장하게 이 땅을 떠나갔다.

한국에서 토목설계사무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에 평범한 주부로 살던 엄마는 뒤늦은 나이에 이민이란 선택을 하며 낯선 땅에서 말못할 고생을 숱하게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엄마와 아버지는 열심히 사셨고 동생은 아르바이트에 공부까지 악착같이 했다.

그 무렵 한인이 운영하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생이 보낸 편지 내용 중에 오랫도록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샌드위치 가게 주인이 한국 사람들은 코리안타임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미국에서는 먼저 시간을 지키는 방법부터 배워야 한다면서 꼭 출근시간을 지키라고 엄명을 내리고는 퇴근시간은 지키는 법이 없이 늦게까지 일을 시킨다고..."

그렇게 어렵게 UCLA를 졸업한 동생이 한국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미국에는 엄마와 아버지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성경쓰기를 시작하신 날짜와 마친 날짜
성경쓰기를 시작하신 날짜와 마친 날짜 ⓒ 추미전

그때부터 엄마는 한국의 모든 것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사막 위에 세운 도시인 LA에 살면서 LA에는 왜 이렇게 비가 안 오는지 모르겠다며 한국의 빗소리를 그리워했고, 여름이면 LA에는 왜 매미가 안 사는지 모르겠다며 매미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쑥을 캐고 싶은데 미국에는 쑥이 없다면서 간혹 마트에서 쑥을 사와도 도무지 쑥향이 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는 사이 딸 셋은 한국에서 다 결혼을 해 아이들을 낳고 손주들은 쑥쑥 자라고 있었다. 이 땅을 떠날 때는 매정하게 돌아섰지만 미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이삿짐을 싸서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엄마는 성경을 쓰기 시작했다. 성경을 쓸 때는 항상 깨끗한 옷차림으로 정해진 테이블에 앉아 정해진 펜으로 써 내려갔다. 엄마의 성경쓰기는 일종의 기도였다. 가까이 있지 못한 딸들을 마음에 품고 딸들이 생각날 때마다 기도처럼 성경을 써내려갔다.

딸들이 손주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가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 직장생활하랴 자식 키우랴 동동 거리는 딸의 일손 하나 덜어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마다 엄마는 테이블에 앉아 한 자 한 자 성경을 써내려갔다.

"성경을 쓰다 자식 생각에 눈물을 뚝뚝 흘려 기껏 필사한 성경을 다 적셔서 버린 종이가 한 두 장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게 미국에서 쓴 성경이 모두 6권이었다.

미국의 인연들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오면서 미국의 친구 두 사람에게 성경 2권을 주고 4권의 필사성경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시는 성경 시편 23편
엄마가 가장 좋아하시는 성경 시편 23편 ⓒ 추미전

 정해진 성경 쓰는 테이블에서 성경 쓰시는 어머니
정해진 성경 쓰는 테이블에서 성경 쓰시는 어머니 ⓒ 추미전

엄마의 필사성경은 세 딸들에게 하나씩 주어졌다. 한국에 온 지 꼭 1년, 일년 내내 계절의 변화가 없는 나라에서 살다 온 엄마는 초록이 무성한 여름을 지나 온 세상이 단풍으로 물드는 찬란한 계절 가을을 축복처럼 맞이하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되는 변화무상한 우리나라 기후가 너무 좋다고 한다.

고국에서 처음 맞는 올 봄, 엄마는 집 주변 산으로 들로 내내 쑥을 캐러 다니느라 바쁘셨다. 그리고는 쑥향이 어찌 이리 향긋하고 진하냐고 감탄을 하시며 쑥털털이를 하고 쑥떡을 해서 봄철 내내 주식으로 드셨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엄마는 다시 성경쓰기를 시작하셨다. 성경을 쓰는 공간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태평양을 건너 달라졌지만 엄마의 기도는 여전하다. 사는 모습을 훤히 눈앞에서 보니 자식들을 위한 기도제목은 더 늘어난다. 그래서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엄마는 한국에서도 다시 성경쓰기를 시작했다.


#엄마의 성경#필사성경#성경쓰기#시편 23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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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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