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은 잠정적 가해자가 아니라 그냥 '가해자'다.""혐오의 가장 높은 단계는 살인이다. 남성 전반이 의심받고 일반화 당하는 게 당연하다."여느 페미니스트의 말이 아니다. 네 명의 '반성하는' 남자들이 모여서 한 말이다. 이들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고, 여성들이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는 것이 '성별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는 주장에 코웃음을 친다. "여성들의 고통과 분노에 공감하고, 우리가 여성혐오 사회에 일조했다는 것에 반성하자"는 게 네 명의 공통적인 목소리다.
'반성하는 남자들'은 분명 한국 사회에선 소수에 가깝다. 스머프(28)는 남성으로선 드물게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직장인이다. 생선(27)은 진보정당 활동을 하며,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 모임도 계획 중이다. 자몽(24)은 대학 내 독립언론에서 글을 쓰며, SNS에서 활발하게 '여성 혐오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먼지(27)는 주변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고정된 성 역할'에 반발하는 목소리를 내며 고군분투 중이다.
다음은 지난달 28일 서울역의 한 카페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된 좌담회를 정리한 내용이다. 솔직한 대화를 위해 익명을 사용했다.
"이번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 여성들 분노 왜 이해 못하나"사회자: 처음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접하고서 여성들처럼 즉각적인 분노나 공포가 일어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스머프: 이젠 강남 한복판에서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구나 싶다가, 나중에 추모 움직임이 일면서 '여성혐오' 범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몽: 처음엔 머릿속에 큰 물음표가 생겼다. 황당했다. 그러다가 남성들도 화장실 갔는데 여성만 죽였다는 말을 듣고 '페미사이드(femicide -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 사건이라는 생각을 했다.
생선: 비슷하다. '묻지마 살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가 가해자가 경찰 조사에서 '여자라서 죽였다'고 말한 것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먼지: 별생각 없었다. 강남 인근에서 학원을 다니는 여자친구가 "강남역 10번 출구인데 누가 죽었다"고 했다. 그때 그냥 "그래, 조심해"라고 말했다.
사회자: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나?
스머프: 혐오범죄 관련 법률이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혐오범죄다 아니다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혐오범죄로 느껴졌다. "여자가 무시해서 죽였다"는 말과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타깃 삼는 양태 자체가 사회에 만연한 '여혐'과 동일하다.
생선: 이 범죄를 보고 많은 여성들이 일상적인 차별과 위협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있다. 직접적인 살해 동기가 여혐이 아니더라도, 이런 맥락에서 여성혐오 범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자: 이번 사건으로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거부감은 없나?
스머프: 이번 사건이든 여성을 상대로 한 다른 범죄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낯선 남성이 저지른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밤 길을 걷는데 여성과 나밖에 없으면 여성은 나를 보고 '잠재적 가해자'로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범죄자란 말이냐'라며 화를 낼 게 아니라 그냥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생선: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폭력에 대한 위협이나 공포가 얼마나 큰지 몰라서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에 발끈하는 것 같다.
먼지: 나는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아예 가해자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은 사회적인 사건이다. 여성 혐오적인 사회가 이 사건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사회가 되는 데 나는 엄청난 기여를 했다. 그 여성이 살해당한 것에는 나의 흔적이 있다. 나의 혐오적 발언, 시선 등등... 그래서 나는 나를 포함한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그냥 가해자라고 생각한다.
사회자: 전체 남성을 가해자 내지 잠재적 가해자로 부르면 보통의 남성을 연대 대상으로 포섭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꼭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명명해야 하느냐'는 말도 나오는데.
자몽: 그런 사람들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 안 써도 연대 안 할 거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같은 거 외치시는 분들 아닌가.
먼지: 전략적인 발언을 해라, 전략적으로 대응해라 하는데... 나는 지금이 가장 전략적인 것 같다. 가해자들은 (범죄) 대상 고를 때 약한 사람 고른다. 지금 여성들이 이렇게 들고 일어나면 그렇게 못하지 않겠는가?
생선: 여성 중에서도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공감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혐'같은 센 단어 안 쓰면 이슈화조차 힘들다. 이슈화가 돼야 연대 대상을 찾을 수 있다. 부드럽게만 하면 봐주지도 않는다.
사회자: 어떤 사람들은 여성 혐오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메갈리안'이나 '워마드' 같은 커뮤니티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비윤리적인 주장 내지 발언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스머프: 그런 방법론을 일일이 따지기 이전에 그 사람들의 분노 지점이나 맥락을 봐야 한다. 몰카 찍고 강간해서 '한남충'(한국남성+벌레충蟲을 더한 말. 여성을 혐오하는 한국 남성들을 일컫는다)이라고 불린다면 왜 그런지 고민하는 게 먼저다. 메갈리안이나 워마드를 없애고 싶다면, 그 방법은 간단하다. 그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하면 된다. 거기에 손가락질하고 그럴 필요가 없다.
생선: 메갈리안이 씨앗을 잘 뿌렸다. 이제 학교도 단과대별로 여성주의 모임이 생기려 하고 최근에 여성주의 매체 '페미디아'라는 사이트도 생겼다. 여론을 환기시키는 기능은 제대로 했다. 그런데 한계에 부딪힌 것 같다. 여기서 다른 도약점을 찾아야 한다.
자몽: 계속 그들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남성으로서 별로 할 말이 없는 상황 아닌가. 다만 호모포비아적 발언 같은 게 나올 때는 비판해야 한다. 지지할 건 지지하고, 비판할 땐 비판해야...
먼지: 그런 말들 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치고 여혐에 똑같이 비판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 못 봤다. 여혐은 그대로 방치하면서 여혐을 없애기 위한 방법론적인 것만 비판하는 건 그저 여성혐오 반대 메시지가 불편하다는 뜻 아닌가. 그들이 '센' 발언으로 비판받을 순 있겠지만 그 책임을 그들에게만 돌리긴 어렵다. '김치녀'라는 단어 없었으면 '한남충'이라는 단어가 생겼겠는가?
거침이 없었다. 다들 한국이 '여성혐오 사회'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그 사회를 만든 '가해자'가 남성이라고 주장하고, 여성들의 분노에 공감했다. 딴 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피해 당사자가 아니며 동시에 '남성'이라는 젠더 권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남성 주류사회를 더 편하게 비판할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내 안의 '여혐', 자각하고 반성하는 수밖엔...사회자: 여기 계신 분들은 어쨌든 남성이다. 이번 이슈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일상 속에서 겪는 위협을 실질적으로 이해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자신이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하는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스머프: 사실 이 사건 관련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죽음의 무게를 느꼈다. 포스트잇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불안의 목소리를 접하고 난 뒤에 엄청 정서적으로 힘들었다. 나는 직접적으로 느낀 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느낀 건데,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일상이었던 사람들은 어떨까 싶었다. 이번 사건 때문에 우울하다고 말하니 동료 여성 직원이 "그러면 오래 못 살아요"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먼지: 나도 성추행당한 경험이 있는데 아무한테도 이야기 못했다. 너무 부끄러워서... 여성들이 지금 자신이 당한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진짜 이 사람들이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거구나 싶었다.
사회자: 내 안의 '여혐'을 느낀 적은 없는가? "나도 어쩔 수 없는 '한남'인가 봐"를 외치며 발차기를 한 적이 있을 것 같은데.
생선: 예전 여자친구가 밤거리에서 술 먹은 외국인 남성이 공중제비해서 너무 놀랐다고 했는데, 나는 뭐가 그렇게 놀랄 일이냐면서 핀잔을 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입페미'였던 거다. 밖에서는 엄청 페미니즘 공부하는 남성인 척하는데... 사실 이번 사건 이후로 자기 고백적 글을 많이 쓰고 있다.
자몽: 성당 다녔는데, 그곳이 '마초'스러웠다. 여자 구성원들의 외모를 비하하거나 농담 거리로 삼는 그런 분위기... 스무 살 초반까지는 그런 분위기에 자연스레 익숙했고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여성주의 공부하면서 그런 내 자신이 부끄럽다고 느꼈다. 그래서 성당을 떠났다.
먼지: 가까운 사람, 솔직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남짓' 많이 한다. 여동생에게 "여자애가 늦게 들어오면 되냐"는 꼰대 같은 소리를 한다거나... 여자친구에게도 '맨스플레인' 하려고 든다는 걸 자각할 때가 있다. 그때 그냥 '닥치고 있어야겠다'고 느낀다.
스머프: 공감한다. 나도 가족이랑 가까운 사람일 때 더 그런다. 형과 결혼할 사람이 집에 와서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고 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지금도 해주는 밥 먹는데 나중에 시어머니 잘 챙겨주겠어?" 이런 얘기를 하게 되더라. 전화 끊고 "아 진짜 미쳤구나" 싶었다. 다른 곳에서는 '한남'스럽게 안 사는 연습이 됐는데, 형이 결혼하고 이런 건 새로운 차원이니... 평소에는 저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 부분이 갑자기 튀어나오게 된 것 같다.
먼지: 남자를, 특히 남자들끼리 만나면 안 될 것 같다.
자몽: 남자들은 술 먹으면서 '한남짓' 한다. 내가 '한남짓' 한다고 느껴질 때 찝찝하다.
"성별 갈등을 조장한 것은 남성, 부끄러운 줄 알아야"
사회자: '여성 혐오 반대'를 실천하기 위해 앞으로 각자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궁금하다.
자몽: '거부'다. 남성이기 때문에 밤길을 무서워하지 않고, 승진을 더 잘한다... 등등 남성이 부당한 권리를 누린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를 거부할 것이다.
생선: 단과대 내에서 여성주의 준비 모임을 준비한다. 7명 정도 사람을 모았다. 개인적 실천도 좋지만 '회색 지대' 사람들도 끌어들여야 한다고 본다. 이 모임을 학생 자치기구로 만드는 게 목표다. 내 목소리가 아니라 주변의 비슷한 사람들을 발굴해서 세력을 만들고 싶다. 물론 이것은 남자만의 목소리는 아닐 것이다.
스머프: 오만해지면 안 될 것 같다. 어떤 단체에 있고, 공부한다고 해서 내 자신이 완벽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것 같다. 그리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는 얼굴 붉히는 일이 있더라도 문제제기를 하자고 생각했다. 그 불편함을 꾸준히 지적하다 보면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걸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먼지: 성적인 농담 안 하고, 지금껏 즐겁게 얘기했던 여성혐오적 이야기들 안 하고,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정색하고... 그럴 것이다. 큰일 하려는 게 해가 될 수 있다. 내가 분노해서 섣불리 움직이다가 더 큰 혐오를 발생시킬 수 있다. 모르겠으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자: 아직 반성하지 않는 '한남'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스머프: 추모의 현장에선 혐오를 받는 사람과 혐오를 하는 사람이 충돌했다. 남성과 여성이 부딪힌 게 아니다. 혐오하는 남성으로의 위치로 자신을 이동하고 동일시하면서 이것이 성 대결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혐오는 성별 관계가 불평등한 데서 발생한 것이고, 이런 불평등한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여성들이 목소리 내는 것에 분노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몽: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혐오의 가장 높은 단계는 살인이다. 남성 전반이 의심받고 일반화 당하는게 당연하다. 심정적으로 기분이 나쁘겠지만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야 한다. 여성들을 공격하면서 '멘탈의 빤스'를 벗으면 안 된다. 문명인은 문명인답게 행동해야 한다. 너절한 인간, 추잡한 인간 되지 말자.
먼지: 성별 갈등을 조장한 건 애초에 남성 아닌가.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요즘 '시선 강간'(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는)이라는 말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 말에 대해 예수님이 말한 게 있다. "어떤 사람을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으면 그건 간음한 거랑 같다"고. 그리고 이 시선 강간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이 아주 명쾌하다. "눈을 뽑아라."
생선: 이건 내 고민이긴 한데, 여성혐오는 살인으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직장이나 학교에도 만연하다. 그래서 여성 혐오에 대한 인식이 조금 더 확장됐으면 한다. 고학력 여성에다 페미니즘과 환경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아닌 보편적인 여성이나 남성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언어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활동하는 당에서도 회의를 종종 느낀다. 밖은 전혀 변하지 않는데 안에서만 페미니즘을 논의하면 뭐하겠는가 말이다.
자몽: 그리고 남자들이 이번 사건을 다룬 기사 댓글에 여자친구를 태그해서 "조심해"라든가 "(네가)그렇게 되면 내가 저놈 죽여줄게" 이런 말을 하는 걸 보고 놀랐다. 대체 저런 말을 보고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나
먼지: 사람들이 <테이큰> 같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