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번도 본 적 없고, 이름 또한 들어보지 못한 '낯선 시인'의 책을 소포로 받았다. 요청한 바 없는 우편물. 겉봉투에 쓰인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서야 시집 <숨>(박성진 저)이 기자의 손에 오게 된 경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후배가 있다. 한때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사내인데 사진을 잘 찍고, 문장이 좋으며, 품성 역시 나무랄 데가 없는 친구다. 가까이서 지켜본 바 그의 책사랑은 유난했는데, 결국은 30대 후반에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진주로 내려가 '소소책방'이라는 옥호의 서점을 내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박성진 시집 <숨>은 그가 편집을 맡아 제작한 책이었다. 한 달 전쯤 오토바이로 전국일주를 하던 길에 기자가 거주하는 경상북도 포항에 들른 그에게 "선배,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좋은 시인이 있습니다. 이번에 그분 책을 만들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일단 <숨>은 디자인과 판형이 예쁘고 독특해서 눈에 띈다. 손바닥만한 크기에 보기 드문 재질의 종이와 문양으로 겉을 장식한 것이 적지 않은 공력을 들였다는 게 구구한 설명 없이도 느껴진다.
형식미와 더불어 곡진한 내용까지 담은 시집<숨>은 책이 지닌 형식미와 더불어 안에 담긴 내용 또한 독자를 매혹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숨>을 펼쳐 몇 편의 시를 읽고는 좀 놀랐다. 강원도 고성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다는 서른여덟 박성진의 '시적 품격'이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작품이다.
엄마 눈 속에 내가 있네세 살 아이가완성한 첫 문장엄마 뺨 양손으로 잡고눈을 바라보다, 한참- 위의 책 중 '첫 문장' 전문.2연 6행의 짤막한 소품이지만, 시를 조탁하는 솜씨와 오래 묵힌 듯한 치밀한 문장이 또래의 어느 유명 시인 못지않다. 짐작건대 박성진의 '시적 관심'은 인간을 향해 있고, 그중에서도 특히 아이와 여성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 같다. 세상 모든 사내들에게 '첫 번째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인 어머니에게 헌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아래 시를 보자.
아침, 곶감 상자 접으며내 죄와 이해를 맞바꾸었다자꾸 도리질 치는 어머니전생에 어떤 죄 지었는지 궁금해하며쉽지 않은 일이 될 거라 되뇐다당신 생의 유일한 죄는저라고 말씀드리려 했지만,들창에는 바람이 내는 소리...- 위의 책 중 '딸을 얻다' 중 일부.세상 어떤 아들이 엄마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감정을 지니고 않고 살아갈까. 하지만, 그 감정을 "당신 생의 유일한 죄는 저"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섬세한 마음의 결을 가진 사내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감정을 구체화된 문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불러왔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세상 쓸쓸하고 힘없는 것들을 향해 있는 마음결 고운 마음과 함께 박성진이 지닌 또 하나의 미덕은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선 쉽게 발견하기 힘든 '물기 어린 서정'이다. 대책 없는 형식파괴와 맥락 불분명한 생략, 거기에 시적 성장보다 포즈 잡기부터 배우는 시인들이 있다면 아래 시 '민담 2'를 읽어보길 권한다.
귀하고 맛있는 것이 먹고 싶어계란 한판 삶아이틀을 먹었다쪽방을 얻어소꿉 살 듯 시작한부모님의 신혼 첫 끼니였다세상을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끼며 견디는' 시인들에겐 연민의 감정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두텁고 크게 발현되는 경우가 흔하다. 박성진 시인 역시 마찬가지다. <숨>에는 좋은 시들이 여러 편 실려 있다. 그걸 여기 모두 열거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기자가 이 시집에서 가장 절창이라고 생각하는 시의 전문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다방 여종업원에게까지 나눠줄 연민이 있는 박성진은 부자다. 넉넉한 그 마음의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다. 시의 첫 줄에 등장하는 '적성'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군을 의미한다.
후미진 적성의 다방 레지 모두나의 연인이자 종교였다레지 하나버스 정류장 앞 군인들 비집고갓 목욕탕에서 나온 듯머리카락 젖은 채대파 몇 고개 꺾인검은 비닐봉지 들고 간다버스에 올라탄 군인이 이름 부르자뒤돌아보며 손 흔드는데그 애 아직 앳된 그, 애진짜가 아닐지 모를 이름에 답하며오빠 놀러 와파꽃처럼 웃는 것인데환하게 길 열리고돌아가는 버스 안번지는 미소- 위의 책 중 '나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