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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국회 본회의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을 보겠습니까?"

아크로 게시판에 남겨진 이 댓글만큼 현재 필리버스터에 대한 국민의 열기를 잘 설명하는 표현이 있을까? 필리버스터에 대한 열기는 2002년 월드컵,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생각나게 한다. 필리버스터를 대하는 사람들의 흥분은 그동안 야당 지지자들과 국민이 얼마나 이런 공간을 목말라했는지 반증하고 있다.

한국 민중들은 오래전부터 지배세력에 대한 불만을 마당극의 해학과 굿판의 흥겨움으로 풀어왔다. 필리버스터를 보면 그동안 '이명박근혜' 정권을 통해 쌓였던 불만을 쏟아내는 '굿판' 같다. 굿판의 무가를 들으며 사람들이 그동안의 힘겨움을 해소하고 하나 되는 것처럼, 정치인들이 제사장이 되어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울고 하나라는 동질감을 얻으며 결속을 다진다.

필리버스터는 쇼다. 처음 필리버스터를 한다고 했을 때, 더민주는 심각한 악법인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막기 위한 최후의 카드라는 것을 부각했다. 그런데 뒤늦게 드러나는 사실에 의하면, 더 민주는 테러방지법의 필요성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더민주에서 필리버스터를 하는 목적은 수정안 논의의 시간을 벌기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냥 끝장 토론으로도 될 텐데, 왜 극적인 필리버스터가 필요했을까?한달 전에 이미 예고되었던 직권상정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가 야당 자신들을 위한쇼였는지, 국민을 위한 쇼였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는 국민들이 즐기고 있으니 국민들을 위한 멋진 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댓글과 사람들이 열광적 반응이 보여주고 있듯이 필리버스터는 지난 정권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받은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시원한 '사이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SNS와 야당을 지지하는 신문들은 일괄적으로 필리버스터를 칭송하고 있다. 연설을 한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표현은 연예인에 열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의도와 상관없이 필리버스터는 야당 신진 정치인들의 얼굴알리기 공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법안의 통과결과와 상관없이 필리버스터는 한국의 정치 역사를 새롭게 쓰게될 것이다.

불행히도 필리버스터 굿판은 전 국민을 하나로 묶는 대동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필리버스터에 대한 찬반 여론의 팽팽한 대립은 완충지대 없는 한국정치의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새누리당이 북한 미사일과 사드배치논의로 지지자들을 결집했던 것처럼, 더 민주는 필리버스터로 지지자를 결속시키고 있다. 마치 종교지도자가 부흥회를 통해 신도들의 결속을 강화시는 것 같다.

얼마 전 강준만 교수도 이러한 한국 정치의 종교화에 문제제기를 했다. 그는 지도자 중심주의가 한국정치의 종교화를 이끌고 있으므로 인물 중심이 아닌 이슈 중심으로 논의를 해보자 제안을 했다. 그러나 필리버스터가 만들어낸 상황을 보면, 문제는 단순히 인물이 이슈로 옮겨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 문제의 해결은 정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 정치를 재화를 배분하기 위한 타협과 상생의 기술로 보느냐 아니면 (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 승리의 수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갈등을 푸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와 이에 대한 열광은 현재 한국 정치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중간지대는 사라지고 양극단으로 치닫는, 타협과 상생은 사라지고 전쟁과 죽음을 각오한 결기만 남은 정치. 과연 필리버스터의 굿판은 앞으로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필리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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