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4월 23일 장성군 황룡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까치산 한편에 죽창모형과 장태모형으로 만들어진 조형물 탑이 있다. 이 조형물 탑은 1994년 황룡전투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곳을 우리는 흔히 동학군이 최초로 중앙에서 파견한 정규군과 싸워 승리한 동학황룡전투승전전적지라 부른다. 국가 사적 406호로 지정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동학군은 파죽지세로 전주감영으로 진격하고 무혈입성하였다. 호남을 동학군이 점령하여 장성유림 김선규의 중재로 전주화약을 맺고 호남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12조의 폐정 개혁의 실천으로 최초의 민정이 실시되었다.
여기에서 동학군이 주장한 12조의 폐정 계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동학도와 정부 사이에는 서로 미워하지 말고 서정에 협력할 것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하게 다스릴 것3. 횡포한 부호들은 그 죄목을 엄하게 다스릴 것4. 불량한 유림들과 양반들을 엄하게 다스릴 것5. 노비문서를 불태울 것6. 칠반천인(신분은 양반이면서 천역에 종사하는 7가지 직업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쓴 평양 랩을 없앨 것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것8. 무명잡세는 일체 부과하지 말 것9.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이재를 등용할 것10. 왜와 간통한자는 엄하게 다스릴 것11.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빚을 모두 없앨 것12. 토지는 평균하게 경작할 것동학군이 열악한 무기와 훈련되지 않은 인원으로 정규군과 전투를 펼치면서 승리로 이끌었던 주요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첫째 황룡전투를 진두지휘했던 장성의 대접주 화암 이춘영이란 사람을 주목해야 하며 둘째로 당시에 첨단무기라고 할 수 있는 장태를 말할 수 있다.
장태란 무기는 원래 닭을 키우는 데 쓰이는 닭구장태 만드는 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이 장태 안에 짚을 넣어서 불을 붙인 뒤 수백 개를 관군 쪽으로 굴려 화력을 모두 소모시키고 농민군들이 그 뒤를 따라 접근하여 공격했다.
화암 이춘영 총사령관은 본관은 경주 이씨이며 장성군 삼계면 백산리 태생으로 당시 나이 30세로 동학 첫 번째 전투인 정읍 황토현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후 3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장성으로 돌아와 제2회전을 준비하고 주변 지역에 사발통문을 돌려 지원자를 모병했다. 1000여 명의 군대를 편제한 후 경군의 총탄을 차단할 수 있는 장태 200여 개를 직접 제작하여 황룡전투에서 경군 대장 이학승이 이끄는 300여 명을 몰살 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 후 후손 이공우씨의 증언에 따르면 대접주 이춘영은 장성 성산에 위치한 장성현을 접수한 후 당시 양반들과 갈등이 심해지자 9월 말경 장성군 황룡면 옥정리 토말에 있는 자택으로 집강소를 이전했다. 이후 전봉준이 체포되는 12월까지 장성지역을 폐정 개혁을 실시하는 민정 통치했다고 한다.
둘째로 승리의 주요 요인인 장태를 항간에 장흥에서 제작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교통 사항이나 여러 가지 요인을 살펴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장성 군사나 문헌 그리고 후손인 이공 우씨의 증언으로 살펴보면 화암 이춘영 대접주는 "우리 민초들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를 따르는 혁명군을 야포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관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안을 염려하던 중"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거북선과 망암 변이중의 화차에서 아이디어를 창안하고 청죽을 이용한 장태를 직접 고안하고 제작하게 되었다.
얼마 후 황룡장터에서 광주군 임곡면 가정리에 사는 송영직씨가 대 청죽 450본을 소달구지에 싣고 혁명군 10여 명과 함께 도착했다. 이춘영 총사령관은 곧바로 최경호를 제작 담당으로 임명하고 높이 5척과 길이 12척으로 제작하기로 결정한 후 10개 조를 편성하고 황룡강변 포전에서 200여 개의 장태를 제작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황룡전투의 승리 주 원인인 장태를 고안하고 제작케 한 호암 이춘영 대접주에 대한 정당한 재평가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