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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두암 해안가에 벤치
용두암 해안가에 벤치 ⓒ 황보름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니 몸이 더 침대 속으로만 파고 든다. 달리러 나갈까? 하고 몸을 일으켜 봤지만 오늘은 의지가 발휘돼지 않는다. 그냥 다시 누워 책이나 읽기로 했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을 펴 들었다. 이른 시간이라 룸메이트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오, 여행 와 이렇게 책이 잘 읽히긴 처음이다. 마음이 느긋해서 그런가. 이번 여행에 들고 온 책은 총 다섯 권. 이제 두 권째 읽고 있다. 몇 주 만에 겨우 다 읽은 첫 번째 책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천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트인문학 여행>. 오래 걸리긴 했지만 꼼꼼히 읽은 책인데 언제나처럼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천재들도 다 고생 끝에 낙을 봤다는 이야기던가.

읽을 때마다 실실 웃게 되는 빌 브라이슨 여행기를 읽으며 룸메이트들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리지를 제외한 두 명의 룸메이트는 어제 저녁에 새로 온 중국인. 정말 제주도가 중국인들에게 엄청 인기는 인기인가 보다. 제주에 있는 외국인은 거진 다 중국인인 것 같다. 내 위 2층 침대에서 자고 있던 중국인이 잠시 뒤척이더니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뒤이어 리지와 다른 룸메이트도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깼다고는 해도 하나같이 뭘 특별히 하는 건 없다. 리지와 나야 할 일이 없으니 느긋한 게 당연한데, 다른 두 사람도 희한하게 느긋하기만 하다.

때론 좋고, 때론 싫은 '여행 중 한국 사람 만나기'

외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는 일은 때로는 싫고, 때로는 좋다. 다 털어버리고자 날아간 외국에서 내 나라 사람들과 매일같이 부딪쳐야 하는 상황에 산뜻한 기분을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내 못 보던 자국 사람을 우연히 만나기라도 하면 그게 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세 명의 중국인은 한국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난 게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제주로 놀러 오는 중국인이 한두 명이 아니니 그럴 것이다. 중국말로 솰라솰라 대화가 이어진다.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면서도 세 명의 중국인은 근근이 나를 챙겨 주었다.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 그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간략히 통역해준다. 통역을 해주던 그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그 옆에 있던 사람이 통역을 해주고, 한 명씩 돌아가며 나를 애써 신경 써주는 모습이 재미있다.

키가 큰 중국인은 이번이 네 번째 제주 여행이랬다. 이번 여행은 제주를 자꾸만 가는 손녀를 신기해하던 할아버지와 함께하려 했는데 메르스가 터져 고민하던 끝에 혼자 오게 된 거라고 한다.

"제주도가 좋아?"
"응. 가끔씩 생각나. 와서 쇼핑도 하고 바다도 보고 그러는 게 좋더라구."
"오늘은 어디 갈 건데?"
"지금 생각 중이야. 서귀포 쪽으로 내려갈 것 같긴 한데…"

양 볼이 발그스름한 것이 마치 볼터치를 한 듯 귀여운 외모의 또 다른 중국인은 내게 사진 하나를 들이민다.

"최시원이네, 흐흐. 이 사람 좋아해?"
"잘생긴 거론 최고! 최시원도 좋고 김수현도 좋아. 잘생긴 건 최시원, 연기는 김수현."

나는 그녀에게 그녀의 말에 강력히 동의한다는 눈빛을 보내주었다. 우리 넷은 같이 아침을 먹고 체크아웃할 때까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상대가 어느 나라 사람이건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는 게 더 편할 때도 있다. 모국어가 아니니 자기 생각을 제대로 펼칠 수는 없지만, 오히려 한국사람보다 더 쉽게 친구가 되기도 한다. 나이를 따질 필요도 없고,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를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냥, 여행지에서 두 여행자가 만났을 뿐이다. 두 사람은 상대의 몸짓과 얼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고유의 어투, 표정과 말 그 자체로만 상대를 판단할 뿐이며, 친구가 되기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가끔은 불편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다짜고짜 나이와 이름을 물었고, 나이가 적은 사람에겐 당연하듯 말을 놓았다. 그리곤 동네 동생 대하듯 상대 여행자를 대하기 시작했는데, 그럴 때면 난 슬그머니 그 사람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나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내게 말을 놓는 게 나는 영 불편하다.

나이로 서열이 정해지자 연장자가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고 시간을 휘어잡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시간 연장자는 본인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죄다 쏟아낸다. 나는 그 연장자를 보며 힘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앞에 앉아있는 나이 어린 그 친구도 힘들지 않을까, 안타까웠다. 뭣하러 저럴까 싶었다. 뭣하러 나이를 물어 서열을 매기나 싶었다. 그냥 서로 존중하며 평등하게 이야기를 하면 좀 좋나. 두런두런 주고받는 이야기 얼마나 좋은가. 여기는 여행지인데. 모두다 같은 여행자일 뿐인데.

나이 같은 거 묻지 않고, 나이를 묻더라도 그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과는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디를 여행했는지, 그곳에선 어떤 기분이었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됐는지 서로의 경험을 나눴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땐 그 사람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 사람에 대한 다른 정보는 그 사람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중요하지 않다.

체크아웃을 하기 전, 우리 넷은 침대에 둘러 앉아 내일 리지가 어디로 놀러 가면 좋을지 이야기했다. 운전면허만 딸 생각이었던 리지는 아무 계획 없이 왔다고 했다. 일주일 묵는 동안 운전면허장만 왔다갔다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게 될 판이었다.

리지를 제외한 둘은 나를 힐끗 보며 내가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이미 둘에게 "난 여행을 할 만큼 했고, 이젠 푹 쉴거야"라고 말해놓은 터여서 둘은 내가 시간이 많다는 걸 잘 알았다. 그렇지만 난 이미 둘에게 "난 내일 동문시장에 갈거야"라고 말해 놓은 뒤이기도 했다. 산책 겸 동문시장에 들러 젓갈이나 두 통 사려는 계획이었다.

키 큰 중국인은 리지에게 나와 같이 동문시장에 가라고 말을 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묻는다.

"관덕정 알지?"
"아니... 그게 뭐야?"
"나 거기 가봤는데 괜찮았어. 내일 동문시장 들렀다가 거기두 가봐."
"아... 거기 좋아?"
"응, 동문시장에서도 금방이야."

중국인은 내게 자기나라 여행지를 추천하듯 당당한 태도로 이름도 처음 듣는 관덕정이란 곳을 추천해주었다. 그 당당함에 매료된 나는 내일 꼭 관덕정에 가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리지는 내일 나와 같이 움직이면 된다는 것.

할 얘기도 다 했겠다 우리는 모두 방에서 나왔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오는데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내게 룸메이트가 다 중국인이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불편하진 않느냐고. 나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이런 것도 다 신경 써야 하는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전혀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더 재미있다고.

 용두암 해안가
용두암 해안가 ⓒ 황보름

 용두암 해안도로
용두암 해안도로 ⓒ 황보름

여행에 맞는 성격이란 게 있을까? 

중국인 두 명은 제주의 어딘가로, 리지는 운전면허장으로, 나는 해안도로로 나왔다. 해안도로를 거닐다가 어제 갔던 그 카페로 가 아침부터 읽던 책을 이어 읽었다. 책에서 홀로 여행중인 빌 브라이슨은 미국인 특유의 과장된 유머를 탑재한 채 유럽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쉴새 없이 투덜대고 매일 맥주를 마셔대고 있었다. 책을 읽다가 바다로 눈을 돌려 나는 홀로 여행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도 나같은 길치가, 겁쟁이가, 소심쟁이가 홀로 여행한다는 것에 대해.

여행 중 엄마에게 몇 번 전화가 왔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매번 같은 말을 했다. "난 정말 너가 며칠만에 돌아올 줄 알았다"고. 이유는 이랬다. 내가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이고, 겁 많고, 길치에다, 또 깔끔떠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한 엄마의 평가는 다 맞았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건 내가 더 잘 아니까. 겁도 많고, 소심한데다, 길도 못 찾고, 또 낯가림은 얼마나 심한가.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꼭 그런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꼭 겁도 많고, 소심하고, 낯가림이 심할 필요는 없는 거였다.(길치인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곳 저곳 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다 보니 성격도 변하고 태도도 변하고 또 깔끔떠는 것도 변하게 되더라.

여행을 시작하고 열흘쯤 지났었나. 그곳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이틀간 나를 관찰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혼자 여행하는 거 처음이죠?"
"헛. 어떻게 아셨어요?"
"딱 티나요. 뭔가 아닌 척 하고 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게. 어색해 하는 것도 같고."
"하하. 그렇게 티났어요? 전 나름 선방하는 중이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첨엔 다들 어색해하죠 뭐. 저도 예전엔 제가 이렇게 게스트하우스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혼자 놀기 좋아하고, 또 완전 낯가리는 성격이었는데. 그런데 여행을 오래 하다 보니까 성격이 변한 것 같아요. 지금은 이게 내 진짜 성격이지 싶기도 해요."

나라는 사람을 증명해줄 고유한 성격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싶다. 죽는 그 순간까지 변하지 않을 그 사람만의 고유한 성향이란 건 분명 있겠지만, 성격은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또, 삶의 기쁨 중 하나는 이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 아닐까. 매일매일이 똑같은 나, 아무리 나라도 지겨울 것 같다. 어차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성격은 변하게 돼 있다. 그러니 이왕이면 본인이 적극적으로 본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쳐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니까 혼자 여행도 하고 그러면서.

여행에 딱 맞는 성격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빌 브라이슨을 봐라. 어디를 가나 투덜대기만 할 뿐이다. 보는 사람 누구나 입을 쩍 벌리게 될 유럽의 거대 건축물에 대한 감상은 한 문장으로 넘겨 버리고, 속 터지게 느려터진 엘리베이터서의 경험에 몇 백 문장을 할애하는 여행작가라니. 그런데 그래서 그의 글은 더 생동감 넘치고, 재미있다.

감동하길 잘하고, 탐복하길 잘하고, 착하고, 밝고, 사교성 좋은 사람만 여행하란 법은 없다. 쉽게 짜증이 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여행지의 모습도 있는 법이니. 나 같은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여행지의 모습도 있는 법이니. 그러니 엄마는 괜한 걱정을 했던 셈이다. 여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는 걸 집으로 돌아가 말해줘야겠다.

책을 다 읽고 밖으로 나오니 저물어 가는 태양이 자몽빛 그림자를 바다에 띄워놓고 있었다. 어제처럼 용두암 해안가에서 저녁을 맞았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걸으며 가끔씩 태양을 봤다. 태양은 어느덧 내 눈높이까지 내려와 있다. 휴대폰을 꺼내 태양의 모습을 동영상에 담았다.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내 여행에 대해 알렸다. SNS에 글을 길게 남겼다.

▲ 용두암 해안가에서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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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간 제주에 있기로 하고 제주로 와 벌써 떠날 때가 다 됐습니다. 이틀 후면 서울로 돌아갑니다. 특별히 발 벗고 돌아다니진 않았습니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 위주로 주로 걸어서, 아니면 버스를 타고 휘적휘적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래도 한달이나 있다보니 간 곳이 꽤 되긴 합니다.

지금은 유명 관광코스 중 하나인 용두암 해안가입니다. 막상 용두암엘 오게 되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사람만 많고, 사진 한 장 찍고 가는 것뿐이 달리 할게 없으니까요. 그치만 용두암 해안가를 1키로미터, 2키로미터, 아니, 기운이 좀 있다면 5키로미터 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여기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겁니다. 한 번 해보세요. 바다를 옆에 두고 걷기. 해본 사람은 그 기분을 압니다.

특히, 보통 제주는 저녁 8시만 되도 칠흑같이 어두워지기 마련인데 용두암 해안가는 식당들이 밤늦게까지 뿜어내는 빛 덕분에 늦은 밤 산책하기에 꽤 좋습니다.

산책하다 좀 쉬고 싶을 땐 바다를 보세요. 바다를 보고 있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지는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정말루, 여기저기에서! 그렇게 해를 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해가 내게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곤 곧 해가 내 머리 위로 굉음을 내며 넘어가는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도 되지요. 바로 이렇게요.

위의 글을 방금 찍은 동영상과 함께 올린 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몇 번이고 더 지는 해를 구경했다. 어느덧 바다는 어둠에 잠겨 버렸고, 저 멀리 고기잡이 배들만이 빛을 뿜어내고 있다. 제주의 밤이 또 시작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제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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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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