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과 86년 두 차례, 여름방학에 충북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현재 도로명 유상4리)로 농촌활동을 간적이 있었다. 그때만해도 마을엔 젊은이는 물론이고 청소년들을 위시해서 어린이들도 제법 많았다.
낮에는 논과 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저녁엔 마을회관 등지에서 청소년과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서울에서 온 대학생 언니오빠들 구경도 할겸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해 주었다. 소위 '관계기관'에서 나오신 분들은 혹시라도 불온한 내용(의식화 교육)이 있을까 호시탐탐 이런저런 채증을 했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농활에 참여한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농촌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당시는 소갑파동으로 홍역을 앓았었던 시기였다. 그야말로 '소값이 개값보다 싼'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음모론(?)과 무능함, 그간 농촌지역이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 새마을운동에 대한 비판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은 정권.... 시대가 치열한 만큼 모두들 치열했고, 치열했던만큼 그때의 기억은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당시만해도 증평우시장에서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여 들어와야만 올 수 있었던 연풍면 유상리, 그래도 살만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30년이 지나면, 농민이 깨어있으면 그때보다는 훨씬 더 살기 좋아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은 의심할 수 없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30년만에 찾아간 그곳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농민이 깨어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국가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마을 정자에서 만난 동네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는 텔레비전을 통해서나 듣는다고 했다. 실제로 들어본지는 오래라고 했다. 농사일을 할 수 있는 이는 이제 20여 명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애써 떠올렸던 30년 전의 이름을 대니, 그 집안은 모두 도회지로 떠났다 했고, 뒤이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리 밝은 소식이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 집을 찾아보았지만, 쇠락하는 풍경 속에서 과거의 기억은 무용지물이었다.
마을 길 초입, 무너진 흙돌담에 홀로 외로이 피어난 붉은 봉선화만이 "30년 전 이맘때도 내가 피어있었지?"하며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