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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을 외치며 이승만 정부와 맞서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고 최능진씨가 사후 64년 만에 다시 재판을 받는다. '비운의 민족주의자'로 평가받아온 그가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열린 셈이다.

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8부(부장판사 최창영)는 최씨의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최씨가 1950년 10월 25일경 합동수사본부에 영장 없이 50일 가량 불법 구금당한 점 등을 볼 때 1951년 1월 20일 육군본부 중앙고등군법회의(아래 군법회의)가 그의 이적죄(옛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것은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최능진 선생
최능진 선생 ⓒ 자료사진
1898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최씨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힘썼고, 해방 후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돼 친일경찰 청산을 강력히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박사를 견제하기 위해 1948년 제헌국회 선거 때 같은 지역구인 동대문 갑구에 출마하려고도 했다.

그런데 선거 이틀 전, 선거위원회는 최씨가 후보 등록 때 제출한 추천인 일부의 서명이 위조됐다며 그의 후보 등록을 무효화했다. 독립운동 경력으로 인기를 끈 최씨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꼈던 이승만 박사에게는 기회였다.

1948년 10월 1일, 최씨는 대한민국 최초의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린다. 법원은 그의 혐의를 인정, 실형을 선고했지만 곧바로 한국전쟁이 터졌고, 최씨는 인민군의 정치범 석방을 계기로 풀려난다. 이후 그는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정전·평화운동을 벌이다 1950년 10월 25일경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다. 이듬해 1월 20일 군법회의는 그에게 총살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재판 자체가 단심으로 끝난 탓에 최씨는 1951년 2월 11일 형 집행으로 사망한다.

그의 아들 고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최만립 대한체육회 원로고문은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 규명 결정이 나오자 재심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재판관할권 문제로 2015년 3월 5일에서야 첫 심문기일이 열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큰아들 최필립 이사장은 그사이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최만립 고문이 재심을 추진해왔다. 최 고문은 재심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네 차례 열린 심문기일 내내 "부친은 이승만을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식재판도 못 받았다"며 아버지의 결백을 호소했다. 또 "다른 욕심은 없고 선친의 명예회복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의 소망대로 최씨는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재판부는 6월 25일 1차 공판준비기일을 열어 심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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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최능진#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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