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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군사훈련복을 입고 단체 활동에 나온 남녀학생들(시안 대당부용원)
같은 군사훈련복을 입고 단체 활동에 나온 남녀학생들(시안 대당부용원) ⓒ 김소연

"나 왔어!"

30대 회사원 J는 아내 W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J는 먼저 압력 밥솥에 쌀을 안치고 퇴근길에 사온 요리 재료들을 씻고 다듬었다. 오목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쓰촨(四川) 고추로 매운맛을 낸 후 해감한 바지락을 넣었다.

다 익을 때쯤 샹차이(香菜)를 넣어 향을 돋우면 칭다오 가정식 라거리(辣蛤蜊)가 완성된다. 찜통에서 왕새우와 고동이 익는 동안 파를 송송 썰어 넣은 간장 소스도 만들었다. 그동안 아내는 거실에서 어린 딸을 어르고 있었다.

"남편이야, 머슴이야?"

한 상 가득 차린 식탁에서 아내가 밥을 먹는 동안 J는 또 바빴다. 왕새우와 고동을 까서 아내의 앞 접시에 먹기 좋게 올려놓았다. 그 일을 마치고 나서야 J는 한 손에 밥그릇을 들고 젓가락을 재게 놀리며 후루루 먹었다. 잔반 처리도 그의 몫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내가 W에게 한마디 했다.

"J가 남편이야, 머슴이야?"

W는 익살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는 남녀가 평등한 중국이라고. 그리고 나도 가끔 요리를 해. J가 야채 요리를 못해서 말이야."

그러자 J가 발끈했다.

"이게 무슨 남녀 평등이야! 여자가 하늘이고, 남자가 땅이지."

W는 웃음기 띤 얼굴로 "흥"하며 J를 째려봤다. J는 다 식어버린 왕새우를 W의 입에 기습적으로 밀어 넣었다. 불시의 습격에 놀란 W가 "아이야~" 중국식 감탄사를 내뱉는 사이, J는 통쾌하게 껄껄댔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복수이고, 그들만의 애정 표현이다.

얼마 후 산둥성 쯔보(淄博)에 사는 W의 친정 부모가 칭다오에 와서 살게 됐다. 중국에서는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부모에게 맡길 경우 대개는 시부모의 몫이다. 아이가 남편 성을 따르기 때문에 그걸 당연시한단다. 그런데 W의 시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시아버지가 간병을 하고 있었다. 의논 끝에 아이가 유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W의 친정 부모가 아이를 봐주기로 했다.

W의 부친은 칭다오에 오자마자 주방일과 청소를 도맡았다. 모친은 아이를 돌보고 특기인 가지요리를 할 때만 주방에 들어갔다. 그런 역할 분담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결혼 4년 차인 J보다 40년 차인 부친의 음식 솜씨는 그 세월만큼 고수였다.

밥, 죽, 야채 요리, 고기 요리... 뭐든 능숙하고 빠르며 맛있었다. 이제 J는 퇴근길에 허겁지겁 시장에 들러 장을 볼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집에 오면 따뜻한 저녁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설거지와 주방 뒷정리만 하면 됐다. 남자들이 주방에 있는 동안 여자들은 거실에서 아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차를 마셨다.

처음 나는 이 낯선 상황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식사 초대를 받고 가보니, 집안에서 가장 연장자인 70대의 부친이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앉아서 받아 먹기가 영 불편했다. 불편한 마음에 설거지라도 하려고 하면 집안 식구들이 모두 일어나 손사래 치며 말렸다. 젊은 J가 만든 음식을 먹을 때와는 기분이 천지 차이였다.

40대 후반인 국제학원 부원장은 외동 아들이 고3이 되자마자 더 바빠졌다. 평소 회식 자리에서 좋아하던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점심 시간마다 집에 가서 아이 점심을 해 먹이고 낮잠을 재웠다. 아이 등교와 저녁 식사 준비도 대개 그의 몫이었다. 집안일에 혼자 그렇게 바쁜 이유를 물어보니 대답이 간단했다.

 남학생과 같은 군사훈련복을 입고 단체 활동에 나온 여학생들(시안 대당부용원)
남학생과 같은 군사훈련복을 입고 단체 활동에 나온 여학생들(시안 대당부용원) ⓒ 김소연

"아내 직장이 집에서 더 멀고 더 바쁘니까요."

오래 전 미국에서 만났던 L도 그랬다. 공부는 아내인 L만 하고, 남편은 집에서 살림을 했다. 그때 한국 유학생 부부는 아내가 내조를 하고, 간혹 같이 공부를 하더라도 시댁 눈치가 보인다거나, 아이 양육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나는 L에게 "시댁에서 뭐라고 안 해? 기준이 뭐야?" 물어보았다. 그 때 L의 대답도 간단했다.

"시댁이 왜? 기준? 그야 내가 공부를 더 잘하니까."

중국에 온 한국 여성들은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부러워한다. 그런데 중국 여성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장이머우의 영화 <붉은 수수밭>과 <홍등>을 보더라도, 과거 중국 여성의 지위는 그야말로 낮고 낮았다. 역사 속에서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서태후(西太后) 같은 특별한 여성을 제외하면 일반 여성은 사고 팔리는 소유물이었고 축첩 제도와 전족의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신중국 탄생 후 중국 여성은 "세상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는(半邊天)" 존재가 되었다. 거기에는 신중국 초기의 신혼인법과 토지개혁법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신혼인법은 봉건적인 혼인 제도와 가부장제를 개혁했고, 토지 개혁법은 여성의 토지 소유권과 경제 활동을 보장했다.

신혼인법으로 일부일처제가 되고 중혼과 축첩 및 과부 재혼에 대한 간섭이 금지됐다. 무엇보다 부부가 재산권을 평등하게 나누게 되었고, 혼인법을 위반한 상대에겐 형사 책임을 지웠다. 물론 초반에는 혈연 공동체로 이뤄진 사회에서 법보다 관습이 여전히 앞섰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전국적인 선전 교육과 부녀 연합회 중심의 대중 운동으로 신혼인법은 점차 법 제도로 정착하게 됐다.

토지 개혁법은 여성에게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분배하고 소유권을 인정했다. 뒤이은 농업 집단화 정책으로 토지 경작과 운영이 가족 단위가 아닌 집단으로 바뀌면서 가장의 힘은 더욱 약해졌다. 대신 여성은 집단의 일원이 되어 생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집단 생활 조직과 생활 복지 사업을 이끌었던 인민 공사는 공공 식당, 보육원, 양로원 등을 만들어 가사노동을 사회화했다. 당시 대부분 문맹이었던 여성이 교육을 받으면서 여성 간부가 나오고 각 계급의 지도부에 배치됐다. 일자리와 임금에서도 남녀 차별이 없어지고 가정에서는 가사 분담이 이뤄졌다(박광준, 오영란 <중국계획출산정책의 형성과정> 참고).

그렇게 과거 집 안에 갇혀 지냈던 여성이 집 밖으로 나와 사회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사회주의 혁명의 건설자이고 노동자로 인식되었다. 당연히 여성의 지위는 향상되었고, 여성은 사회의 보조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절반을 떠받치는 주력군이 되었다.

남녀 평등한 중국? 속사정은 다르다

그런데 중국의 여성 해방 과정은 서구 페미니즘과 달리 남성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제기된 혁명 운동의 일부였다. 계급성, 당성, 인민성이 절대적인 가치를 발휘했던 마오쩌둥 시대에 남녀 성별의 차이나 여성성은 존중받지 못했다. 여성의 본보기는 1972년 판쟈쥔(潘嘉峻)의 유화 '나는 바다 제비(我是海燕)'와 같았다. 폭풍우 속에서 전신주에 올라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만큼, 그야말로 직업, 생활, 체력, 성격 모두 남성화된 이미지였다(양둥핑, <중국의 두 얼굴> 참고).

그 과정을 거쳐 중국 여성의 지위는 한국이나 일본 여성보다 높아졌다. 부부가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을 분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 경제 활동을 하는 성인 여성의 비율, 경제계 및 정계 고위직에 진출한 여성의 숫자 모두 한국과 일본을 앞지른다.

하지만 현실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지 양성 평등까지는 아니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남성 중심의 전통이 공산당 집권 60여 년 만에 소멸되기는 힘들다. 아무리 법률을 만들고 정책을 밀어붙여도, 일상 생활 구석 구석까지 바꾸기에 60년은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위로부터의 개혁 속도와 아래에서 더디게 흐르는 의식의 변화 속도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윈난 쿤밍 거리에서 구두를 닦는 사람들. 대부분 여성이고 아이를 업고 일하는 여성도 보인다.
윈난 쿤밍 거리에서 구두를 닦는 사람들. 대부분 여성이고 아이를 업고 일하는 여성도 보인다. ⓒ 김소연

실제로 신혼인법 초기에 여성이 이혼 신청을 하면 간부가 거부하거나,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토지 개혁법 초기에도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참가하면서 남성들은 노동 의욕과 노동 효율이 떨어진다며 불만을 쏟아냈고, 가사 노동 분담 때문에 가정 불화도 심심찮게 일어났다고 한다. 아직 농촌에 남아 있는 남존여비 사상만 해도 그렇다. 오죽하면 이런 표어가 나왔을까.

"여자 아이를 돌보는 것은 민족의 장래를 지키는 것이다."

여아 차별뿐 아니라 남편의 구타도 암암리에 일어난다. 딸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혼자 칭다오에 온 안후이(安徽)성 출신의 중년 여성 노동자는 고향에서 남편에게 맞고 살았단다. 남편의 상습적인 구타와 바람기는 상류층의 이혼 소송 뉴스에 자주 나오는 이야깃거리기도 하다.

관습과 타성은 법보다 질기다

여성관과 성 역할은 지역, 계층과 교육 수준에 따라 차이가 나기도 한다. 북방보다 남방의 남성이 훨씬 더 가정적이고, 도시 가정에서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을 공평하게 분담하는 편이다. 또 각 가정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고, 정부의 정책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학교 교육의 역할도 크다.

W의 부모는 신중국과 신혼인법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사회주의 혁명 문화가 기세를 떨치던 시기에 교육을 받았다. 남녀가 평등하게 일하는 단웨이(单位, 직장 단위)에서 청장년기를 보냈고, 결혼 생활 내내 가사를 분담했다. 그들은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변동과 함께 사회주의 여성 해방 운동의 전 과정을 체험하고 몸에 밴 세대였다.

W와 J는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고학력자들이다. J와 국제학원 부원장은 가사 노동을 가끔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자신의 몫이라고 여긴다. 내가 가르치던 중국 대학생들도 수업 태도나 행동에서 성별 차이가 거의 없다. 오히려 여학생이 더 적극적이고 성적도 우수하다. 건축학과에 입학한 남녀 학생의 비율도 비슷하거나, 여학생 수가 더 많을 때도 있다. 졸업 후 대학원으로 진학하거나 외국 유학을 가는 경우도 여학생이 더 많다.

농민공과 도시 빈민층은 오직 몸이 밑천인 그들 세계에서 힘이 센 남성의 노동력이 더 우위에 있다. 가사 노동은 노동 강도가 약하고 지속적인 일거리를 얻기 힘든 여성에게 돌아간다. 이것은 개혁 개방 후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시장 경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사회주의 윤리 대신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노동의 가치가 변했다. 개혁 개방 전이라면 정부가 배정한 직장에서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을 여성들의 취업 기회와 노동 조건은 갈수록 열악해진다.

오래 전 동네 골목마다 걸린 계몽 포스터에 등장한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인민복과 노동복을 입었다. 오늘날 거리 광고판에 걸린 여성의 이미지는 섹시함을 강조한다. 계급성과 인민성을 실현하는 사회주의 여성 해방은 이제 먼 옛날의 낡은 이야기가 되었다. 그만큼 여성 문제는 계급 문제나 인종 문제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조건에 따라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 관습과 타성에 젖은 사람의 의식은 불꽃같은 혁명보다 훨씬 더 질기다.

언젠가 한국과 중국 교수들이 회식을 했을 때였다. 한국에서 온 남자 교수가 중국의 국제학원 원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국 여자들은 얼마나 좋아요. 집에 가면 남편이 밥 해주지, 직장에서는 남자 상사 눈치 볼 일도 없지, 여자한테 맞는 남자들도 있다면서요? 중국 여자는 집 안에서도 큰소리, 집 밖에서도 큰 소리, 대신 남자들이 살기 힘든 곳이겠죠, 중국은."

카리스마가 번쩍이는 그 여성 학원장은 잠자코 통역의 말을 듣다가 미소 띤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자세히 보면 남녀 평등인 곳은 없어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녀는 55세에 퇴직을 한다. 남자 교원이라면 60세에 퇴직한다. 중국 정부는 인구 노령화와 노동 인구 감소 때문에 2017년부터 퇴직 연령을 5년 더 늦추기로 했다. 그래도 남자는 65세, 여자는 60세, 여전히 5년의 차이가 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半邊天#중국여성해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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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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