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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소설가가 점점 미쳐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전짓불 앞에서 "북한군의 편이냐, 한국군의 편이냐?"는 질문에 대답을 강요받던 소설가 박준은 진술공포증을 앓게 되었고, 자신을 '광인'이라고 규정하다가 끝내 잠적한다. 소설 <소문의 벽>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개인이 어떻게 파멸에 이르게 되는지를 무섭게 그려내면서, 독자들에게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가 지닌 무게감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표현의 자유가 '<샤를리 에브도> 테러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도마 위에 올랐다. 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타인의 종교를 모독하면 안 된다"는 발언을 하면서 '타 문화·종교 존중'과 '표현의 자유'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실 '표현의 자유'와 '타 종교·문화 존중'은 표현이 다를 뿐 같은 말이다. 특정 종교와 문화를 고수하고 존중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로 대표되는 표현의 자유이며, 그 종교에 대한 풍자도 표현의 자유다.

프랑스 테러 사건의 문제점은 상반되는 두 가지 가치의 대립이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테러라는 자명한 문제점은 제외하고, 프랑스 사회가 '표현의 자유'를 차별적으로 인정한 데 있다. 프랑스는 무슬림들의 전통의상을 금지함으로써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 반면 무슬림의 문화와 종교를 조롱하는 주간지에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며 무슬림과 프랑스인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유발한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는 히잡과 부르카 등 이슬람식 복장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한 프랑스인이 이슬람 여성의 부르카가 불쾌하다는 이유로 강제로 벗기는 일까지 생겼다. 프랑스는 더 이상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피해자'이기 이전에 '억압자'가 아니냐는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마호메트도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타 종교를 풍자할 정도로 극대화된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다. 해당 사회에 "'표현의 자유'가 보장하는 '표현'이 옳고 그름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김수영 시인의 '김일성 만세'라는 시는 표현의 자유가 옳고 그름의 차원과는 상관이 없음을 잘 보여준다. "네 의견이 비록 옳지 않더라도, 너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사회적 약속은 표현의 자유가 잡음 없이 최대한으로 보장되기 위한 필수 요소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선택적으로 인정하는 이중 잣대는 무슬림들에게 '표현의 자유란 옳지 않더라도 인정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지 못했다. 정당성을 운운하며 무슬림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더니, 무슬림들의 입장에서 결코 정당하지 못한 자신들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프랑스의 태도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먼저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중국의 성인 공자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란 말을 남겼다.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의미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국적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부디 프랑스는 공자의 가르침을 아로새겨 무슬림들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진정한 똘레랑스 정신을 발휘하길 바란다.



#무슬림#표현의자유#샤를리엡도#샤를리에브다#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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