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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생인 나는 6·25 한국전쟁의 참상을 직접 몸으로 겪지는 않았지만, 간접 경험한 세대에 속한다.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 방공호 속으로 피신했던 기억 한 조각도 가지고 있고, 난타를 당해 길바닥에 쓰러져 머리에서 피를 흘리던 사람의 모습도 기억하고 있다. 전쟁 전후 벌어졌던 야만적인 살육의 참상이 우리 고장에 남긴 상처도 보고 들으며 자랐다.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 4·19혁명의 전개 과정을 '살아 있는 언론'이었던 신문 보도를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중학생 시절에는 5·16군사 쿠데타의 일부 실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학교 행사에도 군인이 와서 상석을 차지하는 장면, 나이 많은 교장 선생님이 젊은 군인에게 머리를 숙이는 광경도 보았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고무신과 막걸리와 돈 봉투가 살포되는 부정 선거의 실상을 체감하며 한탄했고, 군대 시절에는 삼선개헌 국민투표를 공개 투표로 치러야 했다. 베트남 전장에서는 1971년의 제7대 대선에 투표를 하지 않았는데도 투표를 한 것으로 처리됐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사회인이 되면서 '시월 유신'을 겪었고, 간접선거로 권력을 유지하는 종신 대통령 박정희의 독재와 폭압 속에서 저항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짧았던 '서울의 봄' 시절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꿈에 부풀었으나, 정치 군인들의 정권 탈취와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고, 군사 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 민주주의가 쇠멸되돼 가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계절이 순환하는 세상의 이치 속에는 변화와 발전이 있기 마련이었다. 얼음장 밑으로도 물이 흐르고, 얼어붙은 땅에도 생명의 기운이 스며드는 법이었다. 변화와 발전의 법칙, 의로움을 추구하는 생명의 기운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 갖가지 수많은 어려움과 곡절 가운데서도 우리는 변화와 발전을 성취하며 살아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과 관성도 국민 생활 속에 어느 정도는 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과 가치관의 향상도 체감할 수 있게 됐다.

어느덧 60대 후반기에 접어든 내 삶의 지난 궤적을 돌아보면, 온 생애가 변화와 발전에 대한 희구로 점철돼 있음을 느낀다. 지난한 과정들을 거쳐 이만큼 우리의 역사가 발전해왔음을 실감한다. 그동안 나는 '역사 발전'이라는 것을 신뢰해왔다. 나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발전'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믿고 사랑했다. 정치도 발전하고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가치관도 역사도 발전하기를 간절히 소망해왔다. 민주 발전과 역사 발전이 내 희망이며 믿음이었다. 이름 없는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것을 위해 살아왔고, 어느 정도는 성취감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14년을 돌아보면 참으로 무안해지는 심정을 금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지난 2014년은 지금까지의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이고, 비참하고, 끔찍한 해였다. 더럽고, 어처구니없고, 모멸스러운 가운데 분노로 가슴이 처절하게 들끓었던 해였지 싶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퇴보'를 절감한 탓이었다. 날마다 퇴보를 거듭하는 현실을 절감해야 했다. 발전과 전진을 조롱하고 능멸하는 역사의 퇴보에 내 인생 전체가 함께 무의미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맛보아야 했다.

고작 2년 동안 40년 전의 유신 시절로 역사가 퇴보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유신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작동하긴 하겠지만, 국민의 50%를 약간 상회하는 지지로, 그것도 노년층과 특정 지역의 몰표를 기반으로 획득한 권력으로, 더구나 5년 단임의 대통령으로서 그렇게 분별없이 독재로 '올인'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유신 시절에 대한 향수가 지나쳐서 '유신의 부활'을 추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그것이 가능하리라 믿는 탓인 것 같다. 40여 년 전 '유신 헌법'을 초안했던, 온갖 공작 정치의 주역이었던 '우리가 남이가'의 김기춘을 비서 실장으로 임명했을 때부터 그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렇게 공격적으로 유신의 부활을 획책할 줄은 몰랐다. 유신 시절에 대한 향수도, 유신 부활을 추구하는 것도 사실은 그들의 가치관이 40년 전의 그 시점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일 터이다. 어느덧 60대 후반 세월을 살고 있는 나도 20세기 가치관이나 사고 방식을 극복하고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저들의 시야는 계속해서 20세기에 묶여 있으니 그 시차에서 오는 괴리감이 참으로 크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 역사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역사 발전을 방해하는 행위들이 무시로 자행된다. 국리민복을 위한 일에 시시각각 노심초사하며 살아도 부족할 판에 200만의 지지를 확보한 정당을 헌법의 이름으로 해산해버린 헌법 능멸 현상도 생각할수록 뼈 아프다.

수만 가지 적폐 위에 또 수많은 적폐가 지난 한 해 동안 중첩돼 버렸다. 그 적폐들을 안고 2015년을 맞았다. 그 적폐들 때문에 2015년은 국민 모두에게 더욱 힘겨운 한 해가 될 것이다. 불완전하게나마 '세월호 특별법'이 가동돼 세월호 사건 속에 감춰져 있는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이 경주될 터이고, 그 국민적 노력을 막아내기 위한 새누리당의 집요한 방해공작도 극렬해지겠지만, 그러다 보면 '끓는 가마솥 속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세상을 뒤덮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국정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가 개입한 부정 선거 노출로 차단 효과가 발생해 국민의 눈앞에서 가려졌던 선거관리위원회의 전자 개표 부정 논란도 큰 이슈가 될 공산이 크다. 세월호 특별의원회의 조사와 선관위 개표 부정 논란에 대한 이슈만으로도 2015년은 가시덤불과 같은 형국이 전개될 것이다. 진실과 정의를 차단하려는 권력 놀음, 유신의 부활 획책이 더욱 노정되겠지만, 그럴수록 역사의 전진 반동도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유신공주#유신부활#세월호#부정선거#개표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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