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한테 봉사활동 가는데요. 선물로 뭐가 좋을까요? 선물용으로 쓸 만한 상품 스무 개 있어요?"10년 전 한 식품 매장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손님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횡재가 다 있나 싶었다. 손님은 택시 운전사 복장을 하고 계셨다. 이런 분들이 계시니 우리 사회가 살 만한 곳이다 싶었다. 배달을 위해 매장을 나서던 점장은 나에게 잘하라며 눈짓을 한다. 손님은 바쁘다며 물건을 꺼내는 나를 채근한다.
"이걸로 빨리 포장해 주세요. 그리고 오천 원짜리 지폐를 만 원권으로 교환해 줄 수 있어요? 할머니들 용돈 드려야 하는데."봉사활동 간다던 아저씨... 알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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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량한 택시기사인줄 알았던 아저씨, 알고보니 도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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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하던 나는 돈통을 열고 만 원권을 꺼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세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오천 원 권 뭉치를 손에 들고 나를 보았다. 서로 돈을 바꾸면서 또 돈을 세 보았다. 아저씨는 만 원 권 50장을 받아 지갑에 넣고 선물 포장을 빨리해 달라고 했다. 일단 아저씨에게 받은 100장의 오천 원 권이 든 봉투는 계산대 안쪽에 두었다.
다시 포장을 시작했다. 아저씨는 밖을 내다보더니 몇 번인가 들락거리며 나를 재촉했다. 그리고 포장이 다 됐다. 그런데 아저씨가 안 보인다. 밖을 내다봤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왠지 불길했다. 5천 원 권이 든 봉투가 생각났다. 놔뒀던 자리를 다시 찾았다. 없다. 순간 멍해졌다.
'왜 돈이 없지? 도둑이다.'오늘 매출을 올려줄 것으로 생각했던 아저씨가 실은 도둑이었다. 포장에 열중하는 나를 정신 없게 만든 뒤 오천 원 권이 든 봉투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지금이라도 쫓아나가 "도둑이야"하고 소리를 질러야 하나? 매장을 놔두고 아저씨를 찾아 나서야 하나. 이미 아저씨가 나간 지 10분이 지난 뒤였다. 벌써 차를 타고 도망을 쳤을 거다. 바깥 거리는 전과 같이 조용한데 내 속은 달랐다.
망연자실한 채 앉아 있었다. 몇 주 전 언니가 내게 해준 말이 생각났다. 잠깐 매장에 들른 언니는 "돈통 조심해" 딱 한마디 말을 남기고 갔다. 나는 언니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는데, 장사하는 언니의 눈은 정확했다.
점장이 말했다 "야근해서 식대로 메워보면 어때요?" 50만 원을 어떻게 메워야 하나? 10시간이 넘는 노동으로 끽해야 백몇십만 원 버는 내가 50만 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막막했다. 비상금이라도 있길 하나... 결국, 남편에게 말해야 했다. 남편에게는 뭐라고 말할까? 고민하던 차에 점장이 돌아왔다.
"그 아저씨 많이 사갔어요?"아무것도 모르는 점장은 싱글벙글 웃었다.
"도둑이었어요." 점장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나를 위로했다.
"그런 일 많아요. 아주 작정을 하고 덤비면 당할 수밖에 없어요."점장은 전에 근무했던 곳에서 일어난 노신사 도둑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었지만,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다. 어쨌든 내 잘못이었고 돈을 메워야 했다.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생활비 통장에서 돈을 빼서 매장에 입금했다. 점장은 내가 안 됐는지 한 가지 방안을 이야기했다.
"매일 야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녁 식대가 나오니까, 그 돈을 아껴서 50만 원을 만드는 게 어때요? 천 원짜리 김밥 먹고 식대 모으면 50만 원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생활비 통장에서 '생돈' 50만 원을 헐어낸 것을 너무 아까워하고 있었는데 점장의 제안은 마음에 쏙 들었다. 그 이후 나는 식대로 50만 원을 만들 생각에 열심히 야근했다.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점장이 식대를 챙겨 줄 생각을 안 했다.
"점장님, 저 50만 원 안 주세요?""아휴~ 식대요. 지금 우리 매장이 그거 말고도 빵구(펑크)가 많이 나서. 저녁 식대로 그걸 메꿔야 할 거 같아요. 미안해요."점장의 말에 화가 났다.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점장의 표정은 냉랭했다.
식대 준다더니... 어떻게 이럴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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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원짜리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모으려했던 식대,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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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수당도 못 받으면서 식대 벌자고 천 원짜리 김밥 먹으며 야근했던 내가 미친X이다.' 그동안 야근을 해온 까닭에 남편이 아이 저녁 챙겨 먹이느라 고생을 했다. 수당도 아닌 저녁 식대를 아껴서 도둑이 훔쳐간 돈 만회하겠다고 아이까지 고생시키다니... 남편에게 식대 모으려고 야근한다는 말을 안 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 생각하면 점장에게 "이런 게 어디 있느냐"고 따져 볼 만도 한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해 보지도 못했다. 왜 그리 바보 같았을까? 솔직히 그런 생각하고 살 겨를도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는 내가 데리고 있었고, 4살인 둘째는 친정에서 돌봐 주고 있었다. 첫째는 학교 끝나고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친구네 집에 가 있었다.
아이 둘을 낳은 아줌마를 뽑아준 게 고마워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했다. 근로 계약서를 작성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작성했다 하더라도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본 기억이 없다. 그냥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힘들어서 수당이 있는지, 식대는 언제 챙겨주는지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그러기엔 솔직히 눈치가 보였다.
그 뒤로 일부러 야근하는 일은 없었다. 50만 원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50만 원을 도둑맞은 것은 분명히 내 잘못이다. 그 돈을 만회하려는 욕심을 부리다가 일이 꼬인 것이다. 50만 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엔 점장에 대한 배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안 좋게 생각할수록 그런 점장에 속아 넘어간 내가 바보가 될 뿐이었다. 생각을 바꿔 먹었다. '점장도 처음부터 나를 속여먹으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겠지. 어찌하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은 편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10년 전의 나는 그랬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린아이 둘을 둔 일하는 엄마는 웬만한 부당함은 따지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아직도 '을'들은 이런 답답하고 억울한 대우를 그냥 받고 살아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