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에는 기와지붕의 고택이나 절에 있는 건축물들 그리고 고택의 마당에 놓인 오래된 정원수를 봐도 그다지 큰 관심이 가질 않았다. 그러나 불혹이 넘어 세상 물정을 하나 둘씩 알아가다보니 오랫동안 내려온 우리의 옛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운치가 있는지를 깨닳아 가고 있는 요즘이다.얼마전 경상북도환경연수원에서 교육을 받던 중 한 교수님이 말하시길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전문가가 되라"는 말과 함께 주변의 자연환경을 비롯해 숨겨진 역사의 현장을 찾아보길 강조했다.평소에는 별달리 눈여겨 보지 않던 곳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면 많은 것들을 알 수 가 있다. 비록 학자는 아닐지라도 유래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인터넷을 검색해 얼마든지 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다.민족의 명산인 금오산을 엎어지면 코닿을 듯한 거리에 두고 있는 구미시에 살고 있는지라 꽤나 많이 지나쳐 간 곳이 금오산 밑의 채미정(採薇亭)이다. 유명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을 들여다 본 것은 손꼽을 정도다.
지난해에 내가 몸담고 있는 구미시청소년자원상담원 모임에서 월례회의 할 장소를 채미정으로 정해 처음으로 채미정 정자에 앉았던 적이 있다.
그후로 1년 만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교육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전과는 다른 의식을 가진채 무엇인가를 탐구하려는 자세로 무장하고 왔다.
날씨 좋은 화창한 가을날 형곡동 집에서 출발해 형곡전망대를 넘어 달려와 채미정을 탐방했다.
뒤에는 산이고 앞에는 조그만 개울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터라고 생각하며 채미정을 들어선다.
개울 위 돌다리를 건너 흥기문을 지나 오른쪽 편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채미정이다. 흥기문은 '이 문에 들어 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롭게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라는 뜻이 있단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인 금오산 채미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고려 말 학자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구미향토문화백과에 따르면 '채미정' 이름은 고려가 망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한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 숙제가 고사리 캐던 고사에 비유해 이름을 지은 것으로서 한자말로 캘 '채'와 고사리 '미'자를 쓴다.
예전엔 채미정을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정자처럼 쉽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이제 좀더 관심이 생겨 자세히 들여다 보니 마루의 중앙은 온돌을 꾸며 놓았고 그 둘레에 마루를 깔아 놓았다. 게다가 위로는 문짝이 걸려져 있는 독특한 구조다.
추운 겨울날에도 가운데는 뜨뜻한 온돌 위에 스승이 앉고 마루에는 제자들이 둘러 앉아 추위에 떨지라도 스승의 진중한 말씀을 귀담아 듣던 향학의 열정을 떠오르게 한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를 알고 싶어 한민족대백과를 찾아 보니 "주상의 2익공은 쇠서[牛舌]위에 연봉(蓮峰)을 조각하였고, 귀포는 귀한대와 함께 2제공 위에 용두를 두었으며, 주간에는 초각 화반(花盤)을 1개씩 배치하였다." 조금 당황스러운 용어들이었지만 굴하지 않고 차차 알게 되겠지 하며 다음을 살펴본다.
"가구는 5량가로서 퇴량을 양봉이 받았고, 중앙 온돌방의 기둥이 고주인 관계로 퇴량 위에 접시대공을 놓아 외기틀을 받고 있다."
외계어처럼 들리지만 한자의 의미를 잘 되새기면 이해 갈 수 있는 용어들이라고 생각하며 옛 건축물들에 대해 표현하는 말도 자주 듣고 사용하다 보면 익숙해지리라 여겨진다.
흙과 짚단으로 만든 초가집 일색이었던 옛 시절에 이러한 구조물들을 짓는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대공사였으리라.
들문이 들려져 있는 네방면으로는 벽이 없고 탁 트여 있는 곳이다. 아마도 무더운 여름날에는 공부만 하던 옛날 선비들이 더위도 식힐겸 마루 둘레에 모여 앉아 풍류를 즐기기에 딱 좋은 곳이지 아니었을꼬.
이곳의 주인공인 채미정은 장대석 기단 위로 원통형으로 깍은 화강석 주춧돌을 놓고 기둥이 세워져 오랜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 튼실함이 새삼 느껴졌다.
채미정의 왼쪽 편에는 구인재(救仁齋)가 있는데 나무의 바랜 색깔을 보니 고택이 지나온 세월이 심상치가 않다. 게다가 기와 지붕에는 와송이 삐죽이 자라 있어 그 운치를 더해준다.
유례를 찾아보니 채미정의 구인재는 길재선생께서 후학들에게 '주례'를 가르치던 곳이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여기 말고도 구인재가 여러 곳 있던데, 한국고전용어사전에는 고려 예종 4년(1109) 7월 국학에 설치한 칠재의 하나라고 나와 있다.
튼실하게 5개의 기둥으로 처마를 받쳐 놓은 구인재는 중앙에 넓직한 우물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온돌방이 있다. 아기자기하게 잘지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채미정과는 다르게 나무기둥에 칠을 안한채 그대로 나뒀다해서 백골집이라고 한다.
구인재를 보니 "왜 아무런 칠을 않했을까?" 생각 들게 만들며 옛 건축물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나중에 집으로 와 한때 건축을 전공했던 아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물어보니 나무의 결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자연 그대로를 나타내며 검소함을 나타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듣고보니 고사리를 뜯던 양반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든다.
아내는 덧붙여 이와 비슷한 건축물은 기둥이 주심포 양식으로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이 있다고 한술 더 떠 알려줬다.
채미정과 구인재의 뒷편에는 숙종 임금께서 오언 길재의 충절에 감격해 읊은 오언절구(五言絶句)가 보존된 경모각과 비각인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그 어떤 임금인들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한 길재와 같은 멋쟁이 충신을 싫어했을까.
경모각과 비각 사이에 심어져 있는 경북환경연수원에 교육 받으러 다니며 알게된 배롱나무가 의외로 잘 어울린다. 자연교육을 받은 탓인지 자연친화적으로 잘 배치해 놓은 선조들의 미적 감각이 돋보였다.
경모각과 비각을 둘러본뒤 다시 채미정으로 되돌아 나오니, 처음에 들어섰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웅장함이 눈에 들어왔다. 흥기문의 옆에 오래된 나무가 마침 떨어지는 햇살에 그 자태를 뽐내듯 당당하게 서있다.
이 멋떨어진 나무는 얼마전 경북환경연수원에서 알게된 회화나무와 모양새와 같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의하면 회화나무란 중국에서 학자수(學者樹)나무라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일을 가져오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향교나 궁궐, 사찰 등에서 대거목을 볼수 있단다.
공해에 강한 활엽수로 알려져 요즘은 가로수나 공원수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충절의 대명사인 길재 선생이 계셨던 이곳엔 바쁜 도시생활에서 벗어난 여유로움과 옛시절의 향기가 서려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건물을 지어도 수십년 뒤면 다시 허물고 또다시 지을 생각만 하고 있는데, 이곳은 수백년 동안이나 굳건히 옛모습을 간직해 오고 있어 너무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후손들에게 길재 선생의 마음을 오랫동안 전해 줄 수 있는 역사 깊은 이곳을, 늘 낫놓고 'ㄱ'자도 모르는 까막눈처럼 그저 스쳐 지나온 시간들이 아쉽기도 했지만,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와 발자취를 더듬으며 이곳을 자주 찾다보면 시나브로, 언젠간 길재 선생의 그 숭고했던 충절과 마음을 알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리고 오며가며 자주 보던 '회고가(懷古歌)'를 따라 읊어 보며 길재 선생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야은 길재(1353~1413)-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도 배웠지만 그 당시엔 느낄 수 없었던 이 싯구의 의미가 새삼 가슴을 내리친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인생무상을 떠올리게도 하며 아둥바둥 화려한 인생을 살아도 끝내는 초야에 묻혀 안빈낙도를 꿈꾸며 사는 옛 선비의 심경을 맛보게 된 날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유통신문>과 <한국유통신문>의 카페와 블로그에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