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
▲ 장례식장에서 급하게 구입한 수의는 몇 가지 항목이 빠져도 그것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 엄마의 걱정이다. |
ⓒ 김혜원 |
관련사진보기 |
치매 아버지를 돌보시느라 부쩍 몸이 쇠약해진 엄마는 요즘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하신다. 그러다 보니 쪽잠을 자면서도 가위에 눌리는 일이 자주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엄마의 꿈이다. 예로부터 죽음과 연관되었다고 해몽되는 꿈을 자주 꾸시며 꿈 때문에 더 우울해 하신다.
"엄마, 꿈은 반대라잖아요. 그리고 요즘 엄마가 몸과 마음이 허약해져 있어서 그런 꿈을 꾸는 거니까 너무 꿈에 마음 쓰지 마세요. 엄마 꿈대로 되었으면 벌써 우리 자식들 다 엄청 부자 되고 엄청 유명해지고 엄청 성공했을 거야. 로또도 몇 개 맞고... 하하하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엄마의 꿈 소동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새벽에 전화해서 간밤에 꿈이 좋지 않았으니 자동차 가지고 나가지 말라거나 아이들 찻길 조심시키라고 하셨다. 또 뜬금없이 누가 임신하지 않았냐며 태몽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자주 하셨다. 하지만 엄마의 꿈 대부분은 웃고 넘기는 한편의 에피소드였고 자식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의 또 다른 표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한 번이 아니라 수차례 비슷한 꿈을 연작(?)으로 꾸다 보니 당신도 은근히 걱정이 되신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아버지 여든둘이신데 아직 수의도 장만하지 못했더라. 막상 돌아가시고 나면 허둥지둥 장례식장에서 바가지 쓰고 사서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채 염을 하는 경우도 있어. 이번 9월이 마침 윤달이니 네 아버지 수의나 해드려야 할 것 같아. 미리 준비해 두면 너희들도 좋잖니."계속 미루게 되는, 부모님 죽음 준비하는 일엄마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했다. 자식이 넷인데 그 누구도 부모님 수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자식 입장에서는 부모님을 모시고 영정사진을 찍으러 간다거나 수의를 맞추러간다거나 하는 일들이 편치는 않다. 남의 장례식장에 다녀오면 잠깐 필요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건강하신 모습을 보면 공연한 걱정을 하는 것 같아 뒤로 미루는 게 바로 부모님 죽음을 준비하는 일일 것이다.
"실은 엄마가 심란한 마음도 가라앉힐 겸 해서 광장시장에 몇 번 다녀왔다. 가서 수의 가격도 물어보고 수의 만드는 베 가격도 물어보고 수의 만드는 공임은 얼마나 드는지도 물어봤어. 비싼 건 500만 원도 넘고 중국산 싼 건 몇 십 만 원이면 하겠더라.""엄마도 참, 거길 왜 혼자 가. 자식들 다 있는데. 우리가 다 해 드릴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다리도 아픈데 버스 타고 다니면서… 그게 뭐 그리 급하다고… 수의하면 오래 산다며. 우리가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데 그것이 화인지 서러움인지 안쓰러움인지 죄송스러움인지 알 수 없어 얼른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보름 뒤인 음력 9월 15일로 날을 잡았다. 윤 9월이 시작되려면 15일이 남았지만 윤달에 들어서면 수의가격이 오르니 미리 맞춰야 한다며 잡으신 날이다. 그리고 엄마는 소풍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그날부터 보름 동안 들떠 하셨다.
큰사진보기
|
▲ 엄마는 마약김밥에 정말 마약이 들었냐고 물었다. 당연 마약은 안 들었지요. |
ⓒ 김혜원 |
관련사진보기 |
마침내 약속한 음력 9월 보름날 엄마와 세 딸이 손을 잡고 광장시장에 들어섰다.
"엄마가 딸들 귀찮게 해서 미안한데 이것도 다 공부라고 생각해라. 어제 뉴스에 보니 어느 상조회사에서 수의로 엄청 사기를 쳤더라. 그래서 이렇게 미리 장만을 해두어야 해. 젊은 니들이 뭘 알겠니. 그저 부모님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300만 원이든 500만 원이든 그쪽에서 하자는 대로 돈 주고 나면 그만이지. 그때나 효도한다고 비싼 수의 해봐야 그런 사기꾼들 배만 불리는 거야."5년 전 시어머니 장례를 치른 막내 동생이 엄마 말을 거든다.
"그러게. 나도 우리 시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마지막 옷이라도 좋은 거 해드린다고 350만 원짜리로 했었잖아. 그것도 싸구려 중국산이었던 것 같아. 그런 상황에 속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 그리고 수의 해 놓으면 오래 사신다잖아. 미리 해놓는다고 나쁠 거 없지 뭐. 다 좋은데 오랜만에 동대문 시장 왔으니 맛난 것 먹고 구경도 하자."생소한 수의 단어... 자식들끼리 왔으면 어쩔 뻔했나
큰사진보기
|
▲ 수의 장만하러 광장시장에 간 날. 운 좋게(?) 개그맨 정준하를 보았다 |
ⓒ 김혜원 |
관련사진보기 |
여든을 바라보는 엄마와 세 딸은 그날 작은 소풍을 간 기분이었다. 유명하다는 마약김밥도 먹고 순희네 빈대떡도 먹고 수제비에 비빔국수까지 싼 값에 거하게 배를 채우고 만 원짜리 바지도 몇 개 사고 싸구려 귀걸이도 몇 개 사는 등 신나게 쇼핑도 했다.
"어머, 정준하네. 엄마 정준하예요. 저기 뭐 방송 찍고 있나 봐. 죽 먹고 있네. 우리도 죽 먹을까?""그러게. 정말 TV에 나오는 사람이네. TV에서는 뚱뚱하게 보이더니 안 그렇네. 잘 생겼다야. 여자처럼 화장도 했네. 아이고, 시장 와서 저런 사람을 다보네."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연예인까지 구경하며 시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본 후 우리는 마침내 수의 가게에 들어섰다. 이미 엄마는 몇 번이나 들른 가게였지만 가게 주인은 워낙 많은 손님들이 드나드니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이고, 할머니 딸들하고 오셨네. 복도 많으셔라. 수의 장만하시게요. 매장 하실 건가요? 화장 하실 건가요? 여기 국산 강포는 한 필에 50만 원짜리도 있고요, 30만 원짜리도 있고요... 가격은 싼 거부터 비싼 거까지 다 있어요. 중국산은 저렴하고요. 국산 좋은 베를 쓰면 350만 원부터 550만 원까지 다 있어요. 어떤 걸로 보여드릴까요? 보통 매장하시면 좋은 거 쓰시고 화장하시려면 중간급으로 하시면 돼요. 어떻게 좋은 걸로 보여드릴까요?"
큰사진보기
|
▲ 수의를 파는 상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국산 삼베부터 저렴한 중국산 삼베까지 다양한 상품이 전시되어 있다. |
ⓒ 김혜원 |
관련사진보기 |
수의가게 사장님은 이때다 싶었는지 숨도 안 쉬고 수의를 설명하는데 엄마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어제 뉴스에 보니 국산도 다 속인다는데 중국산으로 보여줘 봐요. 뭐 수의하는데 몇 백씩 들여. 그러려면 뭐 하러 미리 장만을 하러 와. 중간 가격으로 한 번 내놔 봐요. 내가 며칠 전 사촌이 죽어서 염하는데 들어갔다 왔는데 수의 가짓수가 빠집디다. 아무리 봐도 속바지도 없고 속곳도 없더라고요. 자식들이 알아서 하는데 뭐랄 수도 없고 애들은 돈 다 주고 했을 텐데 속곳이 빠진지도 모르고… 암튼 하나도 빠짐이 없어야 해요.""아 네, 할머니. 당연하죠. 빠지면 예가 아니죠. 남자는 스물한 가지 여자는 스무 가지가 돼야지요. 여기 보세요. 제가 다 세어서 보여드릴 게요. 할머니가 확인하세요. 저고리, 속적삼, 속바지, 두루마기, 도포, 도포띠… 장메, 악수, 가두, 행전, 조발량… 멧베까지… 맞죠? 하나도 빠진 게 없죠? 이렇게 확인해도 빠진 게 있을 때가 있어요. 할머니처럼 꼼꼼하게 확인하시는 게 맞아요."세상에나! 수의가게 사장님과 엄마의 대화를 들으니 '자식들끼리 왔더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이 말하는 수의에 대한 용어가 무척 생소해서 도무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에 들어가면 타서 없어질 것에 뭐 많은 돈을 들이냐"
큰사진보기
|
▲ 사람뿐만 아니라 강아지도 수의를 입는단다. 천주교, 불교, 기독교의 상징이 들어간 수의. 금박이 들어간 수의는 웬만한 사람 수의보다 비싸다고 한다. |
ⓒ 김혜원 |
관련사진보기 |
엄마와 사장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가게에서 이것저것을 둘러보던 동생들이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나에게 황급한 손짓을 한다.
"언니, 이리와 봐. 이것 좀 봐. 너무 웃긴다. 이거. 이런 게 다 있네."동생이 가리킨 손끝에는 강아지 인형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언니, 이게 강아지 수의래. 강아지 인형에 입혀 놓은 거야. 요즘 반려견 장례식이니 납골당이니 그런 게 있다더니 수의까지 있네. 비싼 건 200만 원까지 간데. 웬만한 사람 수의보다 비싼 거야.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쪽에서도 많이 사간다네."한바탕 유쾌하게 웃고 다시 돌아오니 엄마는 이미 거래를 끝내고 계셨다.
"이걸로 합시다. 수의는 두 번 다시 풀어 보는 게 아니라니까 한 번에 잘 묶어 주세요. 거기에 좀약도 넣어주고."엄마는 이미 시장조사를 끝내셔서 그런지 결정이 빨랐다. 하지만 딸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기왕에 장만해 드리는 거 최상품은 아니라도 중고가 정도로는 해 드리고 싶었다. 중고가라 해도 장례식장에서 급하게 장만하는 수의 가격에 비하면 저렴하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완강하게 당신이 고른 중가제품을 고집하셨다. 화장을 하실 생각이기 때문에 더 좋은 수의가 필요하지 않다는 합리적인 주장이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아쉽기만 했다.
큰사진보기
|
▲ 수의 장만도 식후경. 광장시장의 명물 녹두빈대떡을 먹지 않을 수 없다. |
ⓒ 김혜원 |
관련사진보기 |
"내가 자식들에게 부담주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불에 들어가면 타서 없어질 것에 뭐 많은 돈을 들이냐. 그래도 자식들이 두말 않고 장만해 준다며 이렇게 같이 와주니 엄마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이제 됐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고 엄마 뜻에 따라줬으면 좋겠어. 알았지."하긴 우리가 여기서 고집을 부린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처럼 엄마와 세 딸이 손잡고 다니며 기분 좋게 시장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도 실컷 떨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나 싶다.
태어날 자식이 입을 첫 옷인 배냇저고리를 지으시느라 촉 낮은 백열등 아래서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이시던 엄마의 젊은 시절 모습이 환상처럼 스쳐간다. 그렇게 엄마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첫 옷을 입고 자란 자식이 엄마의 마지막 옷을 준비하는 날. 가을 하늘은 유난히 맑고 네 여자들의 웃음소리는 유난히 높았다.
큰사진보기
|
▲ 자식들은 어떤 것이 좋은 수의인지 알 수 없다. 당연히 구성 중에 뭐가 빠졌는지도 알 수 없다. |
ⓒ 김혜원 |
관련사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