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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봉은사 판전 현판, 추사 김정희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쓴 것으로 현판 중에는 드물게 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돼 있다.
 서울 봉은사 판전 현판, 추사 김정희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쓴 것으로 현판 중에는 드물게 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돼 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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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 있건, 그 건물이 정자이건 누각이건, 서원이건 강당이건, 사찰이건 간에 오래된 건물에는 대개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세로로 써진 현판도 있고 가로로 써진 현판도 있습니다. 한자로 써진 현판이 대부분이지만 한글도 써진 현판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오래된 건물 추녀 아래쯤에 걸려있는 현판은 그 건물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성격과 위상을 나타내기도 하고, 속살이나 사연처럼 감추고 있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판에 담겨 있는 역사와 사연을 풀어 쓴 <현판기행>

<현판기행>(글·사진 김봉규, 펴낸곳 담앤북스)은 영남일보 편집위원으로 재직 중인 저자가 전국에 산재해 있는 고 건축물들을 상징하고 있는 현판을 좇아 기행하며 현판에 담긴 역사와 의미 등을 풀어 담은 기행문입니다.

 <현판기행>(글·사진 김봉규 / 펴낸곳 담앤북스/2014년 7월 30일 / 값 1만 6000원)
 <현판기행>(글·사진 김봉규 / 펴낸곳 담앤북스/2014년 7월 30일 / 값 1만 6000원)
ⓒ 담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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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방방곡곡을 누비며 사진으로 담고 글로 풀어낸 현판들 중에는 공민왕, 흥선대원군,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당대 최고 실력자들뿐만이 아니라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 같은 선비들, 추사 김정희나 한석봉처럼 당대 명필가들이 남긴 친필로 된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소수서원에 있는 '문성공묘(文成公廟)'라는 현판은 주희의 후손인 명나라 명필 주지번이 사신으로 왔다가 들러 남긴 글씨입니다. 경북 안동에 있는 농암 종택에 걸려있는 '애일당(愛日堂)'이라는 편액은 농암의 제자 되는 사람이 중국까지 가서 받아온 글씨라고 합니다.

하지만 애일당 글씨는 농암이 받아오라고 한 사람의 글씨가 아니라 그 제자가 쓴 글씨였다고 합니다.

제자는 명필을 찾아가 글씨를 받았지만 그 글씨가 너무 허접해 보여 다시 써달라고 했더니,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하면서 종이를 가볍게 두세 번 두드리니 세 글자가 하얀 학이 되어서 날아가 버리더랍니다.

이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제자는 다시 써줄 것을 부탁했지만 명필은 끝까지 써주지 않았고 결국 명필의 제자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서 받아온 글씨가 현재의 애월당 현판 글씨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농암의 제자가 세상을 뜨면서 농암이 받아오라고 한 사람의 글씨를 받아오지 못하고 그 제자의 글씨를 받아오게 된 사연을 고백하면서 알려졌다고 합니다.  

불가사의한 필력도 있어

'영남루'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계묘초하한이현석칠세서(癸卯初夏澣李玄石七歲書)'라는 글귀다. '1843년 초여흠 이현석이 7세 때 쓰다'라는 내용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자신의 키보다 컸을 글씨를 어떻게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글씨도 힘이 있게 잘 썼다. 확대 복사할 수 있는 기계도 없던 옛날이라 편액글씨는 편액 크기에 맞는 큰 글씨를 써야 했는데, 믿기 어려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이 편액 글씨는 서예가들로부터도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회자되어 왔다. -<현판기행> 44쪽-   

책을 통해서 만나는 현판 중에는 경남 밀양에 있는 '영남루'에 걸려있는 현판처럼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회자되고 있는 현판도 있습니다. 주로 한자로 교육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니 영남루를 한자로 쓰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키보다도 훨씬 큰 붓을 들어야만 쓸 수 있을 그 커다란 현판 글씨를 썼다는 건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임시정부 요인이자 서예가인 김가진이 쓴 '천등산봉정사'현판
 임시정부 요인이자 서예가인 김가진이 쓴 '천등산봉정사'현판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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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에 새겨진 글씨들은 그 건물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기도 하고 기능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그 건물을 지으며 담고자 했던 뜻을 진하게 농축해 담아내고 있는 함의어(含意語) 이기도 합니다.

현판에 새겨진 몇 글자를 쪽물을 우려내듯이 살살 우려내다보면 전설 같은 사연도 읽을 수 있고 쪽빛 같은 풍류도 절로 우러납니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석천 임억령은 정자 이름을 '식영정'으로 짓고, 그 의미를 담은「식영정기」를 남겼다. 1563년의 일이다. 다음은「식영정기」다.-중략-

내가 임야로 들어온 것도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네. 내가 시원한 바람을 타고 조물주와 더불어 무리가 되어서 궁벽한 시골의 들판에서 노닐 때 '거꾸로 비친 그림자(倒影)'도 없어질 것이며 사람이 보고도 지적할 수 없을 것이니, 이름을 식영(息影)이라 함이 좋지 않겠는가"고 했다. 이에 강숙이 말하기를 "이제야 선생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그 말을 적어 기록으로 삼기를 청합니다"고 했다. -<현판기행> 96쪽-

'장마'를 이르는 '매우'

한반도에서 '매우'가 과거에도 사용되지 않았는지, 사용되지 않았다면 왜 그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매우 대신 오늘날 우리가 장마라고 부르는 기상현상을 가리키는 역사용어가 무엇이었는지 하는 점은 현대 기상학 연구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다.

가령 박정규·황제돈·전영신은 15∼18세기 기간의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 강수현상을 일컫는 용어들을 찾고 각각의 용례와 의미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매우(霾雨), 음우(霪雨, 陰雨, 淫雨), 임유(霖雨), 항우(恒雨) 등의 용어가 확인되는 가운데 매우(梅雨)는 단 한 번의 기록만이 발견되었으며, 이 조차 일본 국왕이 대장경을 청하는 서신 내용을 옮기면서 기록된 경우였다. -<조선 기록문화의 역사와 구조 2>(글쓴이 안승택 외, 소명출판사, 2014) 287쪽-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6년에 부석사를 방문해 쓴 '부석사' 현판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6년에 부석사를 방문해 쓴 '부석사' 현판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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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학술총서로 간행한 <조선 기록문화의 역사와 구조 2>에서 '한국 장마기록의 표류와 농민경험의 뿌리'에 대한 설명 중 일부입니다. 내용에 나오는 '매우(梅雨)'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장마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조사 범위를 <국역 조선왕조실록>으로 한정해 놓기는 했지만 한반도에서 '매우'는 단 한번만 기록된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퇴계 이황의 제자인 송암 권호문(1532∼1587)는 한서재를 짓고 한서재에서 누리는 여덟 가지 즐거움을 읊었는데, 그 중 다섯 번째가 '매우(梅雨)가 그칠 때 미풍이 불어오고 방죽에 푸른 물결이 찰랑찰랑 일면 난간에 기대어 구경하는 것[麥浪波]'이라고 읊고 있습니다.

물 맑은 냇가에서 발을 씻고 둥근 바위에 기대앉아 바람결을 맞으며 갓을 벗어 놓고 머리를 드러낸 채 시를 읊는 것(岸巾石)이 그 넷째이며, 매우(梅雨)가 그칠 때 미풍이 불어오고 방죽에 푸른 물결이 찰랑찰랑 일면 난간에 기대어 구경하는 것(麥浪波)이 그 다섯 번째다. -<현판기행> 171쪽-

왕조실록을 통해서 확인되는 기록은 아닐지 모르지만 퇴계와 류성룡 등으로부터 '자연 속에 묻혀 평생을 고고하게 산 선비'로 불리던 송암이 읊은 글에서 조차 읽을 수 있는 매우(梅雨)라면 매우는 한반도에서도 보다 널리 사용되던 용어는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된 고 건축물 하나하나 마다 똬리를 틀고 있는 고색창연한 역사와 문화, 전설처럼 구비를 이루고 있는 의미와 사연까지를 더더욱 진하게 실감할 수 있는 출발점은 현판에 새겨진 뜻, 현판이 품고 있는 의미를 되새김질 하듯이 새기며 알아가는 데서부터 시작되리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현판기행> / 글·사진 김봉규 / 펴낸곳 담앤북스/2014년 7월 30일 / 값 1만 6000원)



현판 기행 - 고개를 들면 역사가 보인다

김봉규 글.사진, 담앤북스(2014)


#현판기행#김봉규#담앤북스#부석사#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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