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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와 셋째가 다니는 어린이집 옆에는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언뜻 보아 300여 평을 훌쩍 넘는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어린이놀이시설과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정자, 이런저런 종류의 나무들이 들어서 있다. 드넓은 잔디밭도 볼 만하다. 드문드문 잔디 사이로 우거진 질경이와 토끼풀이 잡초 초원을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말이다.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의 흙바닥 운동장과, 잔디보다 토끼풀이 더 많은 주변 잔디밭 등이 어우러진 전경 사진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의 흙바닥 운동장과, 잔디보다 토끼풀이 더 많은 주변 잔디밭 등이 어우러진 전경 사진 ⓒ 정은균

그런데 이곳은 어린이나 유아들이 놀기에 위험한 요소가 너무 많다. 사실 이곳이 '전문' 어린이공원임을 알려주는 것은 공원 한 귀퉁이에 초라하게 들어서 있는 놀이시설 몇 개가 전부다. 그나마 있는 놀이시설들조차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다.

거대한 미끄럼틀은 경사로가 길고 급하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미취학 아이들에게 공포증을 안겨줄 정도다. 그네의 엉덩이 받침대를 매달고 있는 두꺼운 쇠사슬 줄은 그 자체로 흉기 같다. 아이들이 놀다가 쇠사슬에 부딪치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섬뜩하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무엇보다 명색이 어린이공원임에도 어린이놀이시설 공간이 턱없이 좁고 놀이시설 종류가 적다. 공원부지 대부분은 족구장과 농구장, 예의 잡초 초원, 그리고 단단한 벽돌 블록이 깔린 산책로(?)가 차지한다. 군산시는 이곳에서 6세 이하의 아이들이 족구나 농구를 하고, 잡초를 관찰하며, 딱딱한 벽돌 블록 위에서 산책하기를 바란 걸까.

 둘째와 셋째가 다니는 어린이집 뒤편에 있는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 전경
둘째와 셋째가 다니는 어린이집 뒤편에 있는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 전경 ⓒ 정은균

아이들에게 위험과 불편을 주는 일을 원했을 리 없다. 그러니 겉으로는 어린이공원 이름표를 달고 있을지라도, 그곳에서는 주말마다 일반 시민들의 자유로운 여가생활이 펼쳐진다. 족구나 농구 등의 가벼운 스포츠를 즐기고, 음료수 병이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공간이 된 것이다.

설마 군산시가 이런 걸 바랐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의 '친절한 군산씨'는 어린이 안전을 전혀 도외시하진 않았다. 어린이집 원감에 따르면 군산시청에 소속된 공익근무요원이 매주 공원으로 와 청소를 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두 번의 청소로 넓은 공원의 위험요소를 제때 완전히 제거하는 건 무리다. 공원 한켠 정자 옆에 세워진, 시커멓게 탄 흉물스러운 쓰레기통과 그 아래서 뒹굴고 있는 깡통과 쓰레기들이 생생한 증거물들이다.

이런 어린이공원은 어린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실외활동을 자주 한다. 하지만 공원 쪽으로는 아이들을 거의 보내지 않는다. 아이들이 다칠까 염려되어서다.

그러면서도 어린이집에서는 한편으로 군산시에 공원 개선 방향을 꾸준히 건의해 왔다. 작년 6월 3일 제정된 군산시조례 제1080호 '군산시 어린이공원 및 어린이놀이터 관리에 관한 조례'는 그 최대 성과물이다.

하지만 조례는 조례일 뿐이다. 모래가 한쪽으로 쏠려 흙바닥이 깊게 파인 그네놀이터는 모래의 교체, 뒤집기, 보충 등을 규정한, 조례상의 '모래시설의 정비 계획'을 무색하게 한다. '취학 전 아동과 유아를 위한 기구 설치에 관한 계획' 조항은 예의 거대한 미끄럼틀이나 그넷줄을 통해 무력화한다.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 내 어린이놀이시설 모습. 바로 옆 어린이집에 다니는 미취학 아이들이 놀기에는 위험해 보인다.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 내 어린이놀이시설 모습. 바로 옆 어린이집에 다니는 미취학 아이들이 놀기에는 위험해 보인다. ⓒ 정은균

최근에는 어린이집 교사들과 아이들을 격분하게 하는 일까지 생겼다. 지난 6월 12일 오전부터 어린이공원 내에 성인들을 위한 족구장 정비와 운동기구 조성 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그날 오후, 둘째와 셋째를 데리러 갔다가 원감님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기가 막혔다.

공사의 발단은 인근 주민들이 낸 민원이었다. 공원 안에서 가볍게 운동할 수 있는 기구가 없으니 관련 시설물을 설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민원을 접수한 군산시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군산시는 그곳이 어린이공원이라는 사실을 별로 중히 여기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자칫 잘못하면 어린 아이들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성인용 운동기구 몇 개를 공사 시작 며칠 만에 뚝딱 설치해 놓았다.

어린이집은 격앙했다. 군산시청의 관련 부서에 항의 전화를 했다. 어린이공원 개선 항의에 관한 가정 안내문을 만들어 부모님들과 함께 공사 문제를 공유했다. 나도 공사 시작 며칠 후에 현장을 둘러보았다. 까딱 잘못하면 아이들이 크게 다칠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이미 말끔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전에 그곳에서 아이들과 놀 때마다 한숨을 쉬곤 했었다. 어린이집이 인접해 있는 어린이공원이 고작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원 핑계를 대며 어른들을 위한 운동기구를 신속하게 들여놓는 군산시의 태도를 곱게 볼 수 없었다.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 안에 최근 설치된 성인용 체육기구. 6세 이하의 아이들이 놀기에는 매우 위험한 기구들이다.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 안에 최근 설치된 성인용 체육기구. 6세 이하의 아이들이 놀기에는 매우 위험한 기구들이다. ⓒ 정은균

지난 1일 원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나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운동시설 공사 이야기를 들은 한 학부모가 시청에 민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군산시의 답변은 비교적 재빠르게 나온 모양이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어린이공원 시설 보수 및 정비가 예산 문제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 관련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공모 사업에 지원서를 접수해 놓은 상태이니 이르면 8월 정도나 되어서야 일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 아이들에게 안전사고가 일어나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어린이집 학부모의 민원에 대해 군산시가 내놓은 예산 부족 타령도 관공서가 상투적으로 내놓는 말이라 미덥지 않았다. 일반시민의 민원에는 신속하게 반응을 보이면서 돈을 쓴 군산시의 태도에 어떻게 신뢰를 보낼 수 있겠는가.

안전행정부(아래 '안전부')의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시스템' 누리집(www.cpf.go.kr)에는 각 지역별 놀이시설현황 및 놀이시설통계, 놀이시설정책 관련 정보들이 두루 공개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문제의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에 관한 정보는 누리집에 올라가 있지 않다.

현행 어린이놀이시설안전관리법(아래 '어린이놀이시설법')에 따르면 어린이놀이시설 관리주체는 설치검사를 받은 시설에 대하여 2년에 1회 이상 안전검사기관으로부터 정기시설검사를 받아야 한다. 관리주체는 설치검사 및 정기시설검사에 합격했음을 표시하고, 검사불합격 시설에 대해 이용을 금지하며, 월 1회 이상 자체적으로 안전점검을 실시하는 등의 의무도 갖는다.

제45호 어린이공원은 내년까지 설치검사나 정기시설검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 어린이놀이시설법에는 2008년 이전에 지어진 어린이놀이시설에 한해 설치검사를 7년 유예해 주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에 근거해 2008년 이전에 지어진 제45호 공원은 당분간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관련 정보가 안전관리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 내 정자와 불에 탄 휴지통 모습. 어린이집 원감에 따르면, 주말이면 인근 주민들이 정자 아래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이때문에 정자 주변에 깨진 병이 나뒹굴기도 한다고 한다.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 내 정자와 불에 탄 휴지통 모습. 어린이집 원감에 따르면, 주말이면 인근 주민들이 정자 아래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이때문에 정자 주변에 깨진 병이 나뒹굴기도 한다고 한다. ⓒ 정은균

어린이놀이시설 설치검사 7년 유예 조항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상대적으로 더 오래전에 지어진 공원 시설들은 노후화에 따른 위험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법령은 그런 시설들에 대해 오히려 검사 규제를 완화해 주었다. 최근 몇 년간 어린이놀이시설에서의 안전사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소비자원이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박남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어린이놀이터 안전사고는 2008년 328건에서 2012년 1455건으로 늘어났다. 500퍼센트 가까운 폭증이다. 어린이놀이시설법이 발효된 게 2008년 1월이었는데도 안전사고가 오히려 는 셈이다.

이런 상황은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재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시스템에 등록된 어린이놀이시설은 전체 6만2003개에 이른다. 이중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처럼 아직 검사를 받지 않은 시설은 전체의 24.6퍼센트인 1만5236개에 달한다고 한다.

4·16 세월호 참사는 '규제는 악'이라는 그릇된 통념 속에서 만들어진 인재나 다름없다. 유사시 사람들의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련 법령들을 규제가 아니라 최소한의 안전 확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혀 어린이공원답지 않은 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과, 아직 설치검사조차 받지 않은 전국 1만5000여 개의 어린이놀이시설이 조그만 '세월호'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어린이공원#어린이놀이시설#군산시 제45호 어린이공원#어린이놀이시설안전관리법#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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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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