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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집와 지금껏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는 와흘리 할머니는 시집와 쌓인 응어리를 어떻게 풀었을까? 손윗동서(同壻)라도 있었으면 김매며 하소연이라도 하였건만, 가슴에 멍든 얘기를 할 데가 없다. 할머니는 오늘 팽나무 심어진 본향당에 간다. 마을을 지켜주고 여인네들의 말벗이 돼 주는 곳이다. 

와흘본향당 정경 기쁜 일, 노여운 일, 애달픈 일, 즐거운 일, 모든 속내를 드러낼 수 있고 또 그러고 싶어지는 공간이다
와흘본향당 정경기쁜 일, 노여운 일, 애달픈 일, 즐거운 일, 모든 속내를 드러낼 수 있고 또 그러고 싶어지는 공간이다 ⓒ 김정봉

짝짝 갈라져 여간해서 뭉쳐지지 않는 메밀가루를 서로 엉길 때까지 치대어 넙데데하게 메밀떡 만들어 구덕(바구니의 제주말)에 넣고, 꼭 챙겨야한다며 마루에 걸쳐둔 소지를 마지막으로 챙겨간다.

네발달린 고기는 치성 드리러 가기 전부터 먹지도, 상에 올리지도 않는다며 육고기 대신 생선을 준비한다. 돼지고기를 탐하다 부부신이 별거했다는 설화 때문이라 하는데 할머니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예전부터 해오던 대로 하면 그만이다.

숟가락 꽂은 밥과 '한라산'소주, 접시 위에 올린 스테인리스술잔에 술 한 잔 올리고 메밀떡, 과일, 옥돔으로 한상 차려 치성을 드리고, 남이 들을 세라 말로 다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 남긴 얘기를 소지에 담아 팽나무에 달아 놓는다. 그러면 본향신이 나무로 내려와 읽어본다는 것이다.

팽나무와 소지  가슴으로 태운 소지를 몰래 전하는 연애편지 접듯 팽나무에 접어 건다
팽나무와 소지 가슴으로 태운 소지를 몰래 전하는 연애편지 접듯 팽나무에 접어 건다 ⓒ 김정봉

소원을 빌며 부정을 없애기 위해 불살라 공중으로 올리는 종이를 소지(燒紙)라 하는데, 와흘에서는 왜 태우지 않고 팽나무에 걸어 놓는 걸까?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가슴에 두어 시간 대고 있었으니 이 소지는 이미 까맣게 타버린 종이, 소지가 되었을 거다.

음력 10월 어느 날, 어머니는 농사 진 햅쌀로 멥쌀시루떡을 찌고 있었다. '도신떡'을 찌고 있는 것이다. 짚으로 둥글게 말아 시루구멍을 막고 멥쌀가루에 팥고물을 솔솔 뿌린 뒤 아직 덜 마른 호박곶이를 적당히 박아 '도신시루'를 준비한다. 밀가루도 아까워 '딩기'(겨)를 이겨 시루와 솥 틈새를 막고 장작 몇 개 집어넣고 국간을 보듯 '불간'을 보면서 시루떡을 쪘다.  

긴 막대기로 푹 찔러 '떡간'을 보고 올해도 잘 쪄졌다며 만족해하는 어머니, 자식들 불러 모아 장독대 옆 우물가에 도신떡 놓고 소지를 태우며 성주님께 집안의 평안을 위해 비손하였다.

어머니의 시루떡 도신떡은 아니지만 도신떡과 똑 같은 시루떡이다(2007년 촬영)
어머니의 시루떡도신떡은 아니지만 도신떡과 똑 같은 시루떡이다(2007년 촬영) ⓒ 김정봉

신에게 띄우는 편지 소지를 태우다

소지는 시커멓게 탈 때까지 어머니 손바닥에서 떠날 줄 모르고, 거의 다 탈 무렵에 높이 올라야 잘 되는 것이라며 손을 번쩍 올려 하늘로 올려 보낸다. 도신을 지내는 거다. 가슴으로 태운 와흘 할머니 소지나 하늘 높이 불살라 올린 어머니 소지나 모두 다른 신에게 띄운 같은 편지다.  

도신은 새마을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미신으로 몰려 내 고향마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제주섬도 이와 비슷한 처지, 민간신앙을 말살한 일제강점기를 거쳤고 70년대 미신타파운동이 벌어지면서 민간신앙이 많이 쇠퇴하였다.     

그래도 마을마다 신당이 있었던 제주다. 많이 사라졌다 해도 답사 객들의 눈요깃거리가 아닌, 제주사람들에게 '살아있는' 공간으로 제주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아직도 민간·전통·토착신앙을 미신으로 보는 눈이 살아있다.

월평다라쿳당을 아침 일찍 찾아간 적이 있다. 길을 몰라 어느 중년남자한테 물어보았는데, 나를 아래위로 살피더니 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면서 빈정대듯 말하길 "저 언덕위에 있는데 오늘은 굿소리가 안 나네요"라고 한다. 그렇다. 그 중년의 눈초리는 보통 사람들이 민속신앙을 보는 눈 그대로다. 비뚤어진 관념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월평다라쿳당 들어가는 돌담  휘어진 돌담길, 쑥 들어오지 말고 천천히 들어오라는 얘기다
월평다라쿳당 들어가는 돌담 휘어진 돌담길, 쑥 들어오지 말고 천천히 들어오라는 얘기다 ⓒ 김정봉

다라쿳당은 그 중년의 말처럼 언덕위에 있다. 휘어진 돌담길이 본향당으로 안내한다. 단번에 쑥 들어오지 말고 천천히 들어오라는 얘기다. 팽나무에 걸린 화려한 물색이 반긴다. 물색은 신목에게 바치는 최고의 예물로 나무에 갖가지 천을 걸어두는 풍습이다. 

월평다라쿳당 물색 물색은 신목에게 바치는 최고의 예물이다
월평다라쿳당 물색물색은 신목에게 바치는 최고의 예물이다 ⓒ 김정봉

특히 제주에서는 늘 신목과 주변 나무에까지 가지색색의 물색을 바친다. 와흘본향당의 경우 신목은 물론 담 주변 동백나무에도 아리따운 물색이 걸려있다. 신당에 심어진 나무는 모두 신령스러운 나무라 여긴 것이다.   

 와흘본향당 물색  신목은 물론 동백에게까지 아름다운 물색을 바쳤다
와흘본향당 물색 신목은 물론 동백에게까지 아름다운 물색을 바쳤다 ⓒ 김정봉

때깔고운 물색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팽나무 밑, 바람에 쓸려 대나무가지에서 사르르 떠는 새미하로산당의 하얀 무명물색은 스산한 분위기를 전한다. 그나마 좁은 터에 몸집 두터운 팽나무는 제법 의젓하여 듬직해 뵌다. 죽 뻗은 가지는 교회나 성당의 십자가마냥 스산한 마음에 얼른 떠나고 싶은 객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있다.

새미하로산당 정경 무명물색이 스산한 분위기를 전한다
새미하로산당 정경무명물색이 스산한 분위기를 전한다 ⓒ 김정봉

팽나무는 제주의 나무다. 제주말로 폭낭, 이름도 예쁘다. 마을 어귀에 있으면 마을신이요, 신당에 있으면 신목이다. 신령이 타고 내려와 머무는 곳,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공간이다. 그래서 신목이다. 와흘본향당 팽나무는 신목 중에 으뜸이다. 400년 묵은 두 그루 팽나무, 가지마다 신기(神氣)를 뻗쳐 본향당은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다.

팽나무가지  죽 뻗은 팽나무가지는 교회나 성당의 십자가마냥 스산한 마음을 다독인다
팽나무가지 죽 뻗은 팽나무가지는 교회나 성당의 십자가마냥 스산한 마음을 다독인다 ⓒ 김정봉

와흘본향당은 유교문화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던지, 다른데서 흔히 지내는 포제(酺祭)를 지내지 않고 당굿만 일 년에 두 번 한다. 무당과 남녀마을사람들이 벌이는 굿판은 볼만한 거리다. 육지 사람은 좀처럼 때를 맞추기가 쉽지 않아 당굿을 보는 것은 제주사람들만 가지는 특권이다.

와흘 팽나무 400년 묵은 팽나무가지마다 신기가 뻗쳐 본향당은 신령스런 기운이 가득하다
와흘 팽나무400년 묵은 팽나무가지마다 신기가 뻗쳐 본향당은 신령스런 기운이 가득하다 ⓒ 김정봉

그러나 마을 할머니가 비손(손빔)하는 장면이나 무당이 방울소리만 내며 홀로 굿하는 비념이 우리에게 더 감동으로 다가온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본성으로 돌아가 신과 일대일로 대화하는 장면이야말로 엄숙하고 숙연한 장면이다.

이런 숙연한 장면을 송당본향당에서 보았다. 누가 못 찾을까, 동백나무가 길을 안내한다.  그러나 동백이 아니었어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음 깊숙이 쌓인 응어리를 토해내듯 아주 낮은 톤으로 흐느끼는 소리에 이끌려갔다.

한 중년여성이 본향당 석실 앞에 두 손 모아 손빔하며 가슴 속 응어리를 삭이고 있었다. 행여 방해라도 될까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나오는데 다른 두 사람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온 차번호가 '허'로 시작하는 것으로 봐서 이 마을사람이 아니고 아주 먼 곳, 육지에서 온 분들이 틀림없는 것 같다. 

송당본향당 정경  본향당에서 손빔하며 가슴 속 응어리를 삭이고 있다
송당본향당 정경 본향당에서 손빔하며 가슴 속 응어리를 삭이고 있다 ⓒ 김정봉

본향당은 마을사람은 물론 외지로 떠난 사람들 모두의 안식처로, 그들에게는 본향(本鄕)같은 곳이다. 먼 이곳까지 어찌하여 온 것일까? 좋은 일로 왔다면 이 먼 곳까지 발걸음을 하지 않았을 텐데, 본향신에게만 알리고 싶은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의 꼬리가 길어질 무렵, 한편으로 그들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올 몸이 안 되거나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사람들을 두고, 그들에게는 이렇게 찾을 수 있는 본향당이 있고 그들을 보살펴온 본향신이 있으니 말이다. 비나이다! 본향신이여! 상처받은 모든 사람들을 살피소서. 이렇게 마음속으로 비손하며 생각의 꼬리를 잘랐다.  


#와흘본향당#송당본향당#새미하로산당#월평다라쿳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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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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