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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목사님! 저 창숙 선생이에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벨이 울렸다.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 핸드폰을 받았을때 들려온 목소리였다.

'누구지…'

쉽게 목소리의 주인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옛날에 00교회에서 중등부 교사로 봉사했던 창숙 선생이에요."
"전화번호를 정리하다가, 카톡에 있는 목사님 사진을 보고 전화했어요."

그제서야 생각났다. 10여 년 전 신학교를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사역했던 교회에서, 교사로 만나 함께 봉사했던 선생님이었다.

'교사하기가 너무 힘들다'... 설움이 복받쳐 왔다

신학교를 들어가 처음으로 사역했던 곳이 서울 중랑구에 있는 00교회였다. 성도가 수천 명 모이는 큰 교회였다. 일반 학교 선생님들도 중학생들을 맡기 꺼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어 말을 잘 안 듣고 반항도 심해 지도하기가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00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신참 전도사인 나에게 중등부는 맡겨졌다.

착하고 순수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서울에서 말썽피우는 아이들은 다 이곳에 모인 것 같았다. 매주 예배가 끝나면 여기 저기서 싸움이 벌어졌다. 예배 시간에는 선생님들이 인도하는 찬양을 따라하지 않았다. 찬양을 함께 부르자고 하면 "저 지금 사춘기거든요. 소리 지르면 안돼요"라고 대답한다.

설교하기도 힘들었다. 모두 머리를 아래로 푹 숙인 채 강단에서 볼 때 검은 바둑알만 모아놓은 것 처럼 보였다. '혼자 떠들어라, 나는 절대 듣지 않을거다'라고 굳게 다짐한 아이들 같았다.

교사 회의 때마다 아이들 지도에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청소년들에 대한 지도 경험도 별로 없었고, 학생들의 발달 심리도 잘 알지 못한 나는 내 방식대로 중등부를 이끌어갔다.

매주 토요일 선생님들과 학교 앞 전도도 시작하였다. 가을에 있었던 문학의 밤 행사에는 주변의 500여 명의 중학생들을 초청하여 잔치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배 인원은 꾸준히 늘어만 갔다.

어느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교사 회의가 있었다. 건의 사항과 의견들이 자유롭게 오고 갔다. 한결 같은 이야기들은 교사 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인터넷 카페에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을 비방하고 욕하는 글들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앞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모두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순간 남모르게 참아왔던 설움이 복받쳐 왔다. 난 그 자리에서 울음을 쏟아냈다. 그동안 중등부를 앞에서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힘들어도 연약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제는 더 이상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감정을 속이는것도 거짓이며 위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선생님들은 어쩔줄 몰라했다. 그때부터 선생님들도 자유롭게 자신의 가면을 벗어 던지게 되었다. 몇몇 선생님들은 함께 울기도 하고,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신기한 것은 나의 연약함을 드러냄을 통해 우리 모임이 하나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 세족식, 통곡의 시간

곧 있을 여름수련회를 준비했다. 교사들은 밤마다 수련회 준비를 위해서 모였다. 모두 열성을 다했다. 가평의 허름한 학교를 빌려서 2박3일 동안 여름수련회를 진행했다. 어떤 선생님들은 휴가를 수련회 날짜에 맞추고 참석했다. 밤에는 예배와 레크레이션등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낮에는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였다.

2박3일은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하나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말썽 피우던 아이들이 진지하게 기도하고 선생님들이 준비한 프로그램으로 감동을 받고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날 세족식이 있었다. 선생님들이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발을 씻어주고 닦아줄 때는 통곡의 시간이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얼싸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선생님들께 잘못했던 일들이 미안했던지 아이들은 선생님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반성하는 듯 보였다.

수련회를 마치고 집에 와서 자고 있는데 총무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도사님, 중등부 카페에 들어가 보세요. 카페에 불이 났어요."

그동안 선생님들에게 욕할 때만 들어왔던 중등부 카페에 수십 명의 아이들이 들어와서 수련회 때 받은 감동을 나누었다.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의 글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수련회 이후 중등부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자신들이 예배 준비를 돕겠다고도 한다. 자발적인 모임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목사님 그때 말썽피우던 00는 신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때 싸움만 하던 00는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했어요."

이런 기쁜 소식들을 전해주는 분들도 그때 함께 눈물 흘렸던 선생님들이다.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 전화오는 선생님들은 그때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던 분들이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지만 교사로서 보람있었고,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때 한 가지 더 깨달았다. 가장 인간적 모습이야 말로 지도자의 큰 자산이라는 것을.

덧붙이는 글 | 문득 옛 추억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힘든 기억과 기쁜 기억이 있겠지요. 그때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기쁜 추억으로 바뀌었습니다.



#중학생#약함#리더십#교사#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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