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른 건 몰라도 용변이 제일 문제더라. 기저귀 갈아주며 키운 딸에게도 그건 못 시키겠는 거야. 처음엔 참아 보려고 했지. 하지만 그게 어디 참아지는 거라야지. 어쩔 수 없이 남편 손을 빌렸는데... 살 맞대고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그래도 남편이 편하더라. 그때 느꼈어. 점점 남편밖에 없다는 걸 말이야."

최근 대장암 수술을 받은 친구의 병실을 찾았을 때 친구의 남편은 마침 자리를 비운 터였다. 자녀들과 형제들 그리고 남편이 돌아가며 친구의 병실을 지켜주고 있지만 정말 중요한 일(?)을 치를 땐 다른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오직 남편만 찾았다는 친구.

그녀는 삶의 가장 두렵고 무서웠던 경험을 통해 남편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해했다. 암이라는 절망적 상황에 놓이지 않았더라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알지 못했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지극한 사랑을 알게 된 것이다.
     
지난해 여름 <오마이뉴스> 지면에서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기사를 보게 됐다. 병원에 택배 배달 온 아저씨가 장애인들 때문에 배달이 많이 불편하다며 불평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였는데 그의 아내도 지체장애 1급이라 장애인 가족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신과 아내의 상황을 빌려 현실의 문제를 다룬 김재식 시민기자. 그가 6년째 아내의 병상을 지키며 혼신을 다해 간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바로 다음 기사부터였다.

첫 기사에 이어 올라온 김재식 기자의 <간병일기>는 1회부터 먹먹한 가슴으로 시작했다. 

그만 둘 수 있으면 사랑이 아니다. 그건 계약이고 투자고, 취미생활이다. 그만 둘 수 없으니 사랑이다. 힘들고 미워서 돌아섰다가도 등 뒤로 아픈 비수가 날아와 다시 돌아서 가볼 수밖에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마음, 그래서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고 부부 중 하나의 반쪽 생물이 가지는 숙명인 것이다.

그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묶인 우리 두 사람과 우리 두 사람을 알게 됐다는 이유 하나로 또 우리에게 사랑을 줄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웃들에게 말하고 싶다. 고맙다는 말 열 번도 더 했지만 차마 쑥스러워 못한 "사랑합니다, 사랑해주셔서!" 이 한 마디 더 하고 싶었다.
-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 프롤로그 중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
ⓒ 위즈덤하우스

관련사진보기

암수술을 한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오면서 김재식 기자의 간병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님이 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찍어도 남이 된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가볍고 가벼운 세상에서 스스로의 의지로는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부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며 위안이 되는지.

피와 땀과 눈물을 찍어서 한자 한자 적어간 <간병일기>는 어느새 25회까지 연재가 됐다. 그리고 지난 해 12월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라는 강한 바람의 제목을 달아 책으로 출간됐다.

김재식 시민기자는 자신과 아내 그리고 가족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며 격려했던 많은 이웃들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쓰러지지 않고' 병상을 견뎌내 준 아내와 단단하게 잘 자라준 세 자녀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씩씩하게 지난 6년을 살아낸 그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결혼 20주년에 받은 청천병력 선고... 그래도 감사하다

2008년 9월 3일. 부부는 결혼 20주년 기념일에 청천병력과 같은 선고(?)를 받는다. 한 가정을 뿌리째 흔들어 놓은 아내의 병명은 '척수종양'. 이후 수차례의 정밀검사 끝에 아내의 병명은 '척수종양'이 아닌 '다발성 경화증'임이 확인되었다.

진단서에 나와 있는 다발성 경화증의 발병일은 2008년 5월 9일.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의 12살 생일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기념일에 받게 된 불행이라는 선물. 그러나 그들의 선물은 불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불행의 끝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사랑과 감사의 날들을 맞았기 때문이다.      

"2008년 5월 9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의 열한 번째 생일에 아내는 길고 깜깜한 터널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깨와 목에 전기고문을 받는 것 같은 통증이 시작되고 유리로 피부를 긁어대는 고통과 함께 팔다리의 힘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병원생활은 모든 것을 무너뜨릴 듯 그들의 삶을 거칠게 유린했다. 턱없이 비싼 병원비와 치료비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다. 그로 인해 치료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에 놓였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투병의 와중에 공동체적 삶을 꿈꾸던 남편의 미래도 사라졌고 든든한 남편, 사랑스런 세 아이들과 소소한 일상의 재미를 느끼며 살아보겠다는 아내의 미래도 사라졌다. 아이들의 삶도 예외 없이 흔들렸다. 엄마의 병상에 매달려 대소변을 치우며 간병을 하려면 당분간은 꿈도 희망도 재능도 저만치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온갖 상상과 무력감에 자꾸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영동고속도로에는 핸들을 한 바퀴만 돌리면 모든 고통을 끝내 버릴만한 곳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둘째 아이가 영상처럼 떠올라 끝내 핸들을 꺾지 못했다. 스무 살의 남자가 그 황금같은 시기의 꿈을 두 번, 세 번이나 포기하고 미루며 작은 골방에 갇혀 산송장이 되어버린 엄마의 대소변을 치우며 버티는데 남편이자 아빠인 내가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면 그 아이는 무슨 심정으로 그 뒷일을 감당할까. 아무리 떨치려 해도 나보다 더 억울할 둘째아이가 떠올라 그럴 수 없었다."

 병실이 갑갑하다는 아내를 김재식씨가 담요로 꽁꽁 싸매고 국립암센터 병원 뒤쪽으로 데리고 나온 날.
 병실이 갑갑하다는 아내를 김재식씨가 담요로 꽁꽁 싸매고 국립암센터 병원 뒤쪽으로 데리고 나온 날.
ⓒ 김재식

관련사진보기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는 것은 지켜야 할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면 지킬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에 폭풍우 치는 밤도 지내고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터널도 지나오며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닐까.

지난 6년간 폭풍우 치는 밤과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내온 저자는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편하게 숨을 쉬고 수저로 밥을 떠먹고 등을 돌려 몸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는데 6년이 걸렸다. 비록 지렁이와 달팽이가 기는 수준이었으나 결국은 회복한 것이다....(중략)

아내가 병상에 있는 동안 나는 나의 생활을 잃고 아내는 몸의 건강과 자유를 잃었지만 우리는 매 순간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에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아이들이다...세 아이들은 깊은 원망을 품지 않고 잘 견뎌주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그 긴 터널을 뚫고 나와 주었기에 더욱 감사한다."   

자고 나면 슬픈 소식들이 들려오는 요즘.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에서 말하는 '감사'와 '사랑'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질병의 고통과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그것에서 오는 육체적 정신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며 나와 내 곁에 함께 하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힘써 사랑한다면 언젠가는 그래도 지난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웃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조금씩 회복이 되고는 있지만 저자의 아내는 여전히 병상에 머물고 있고 경제적 상황도 나아진 것이 없으나 6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은 매일 '희망'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올 수도 있고 또 더 큰 행운이 찾아와 좋은 날이 올 수도 있지만 단단해진 그 앞에서 상황은 그저 지나는 바람일 뿐이다. 그 바람을 맞으며 미끄러질지라도 한발씩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그의 소중한 '오늘 하루'를 뜨겁게 응원하고 싶다.  

"오늘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비록 두 걸음 오르고 세 걸음 미끄러지더라도, 내일 하루가 다시 선물로 주어진다면 우리는 다시 걸어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 에필로그 중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 - 삶의 굴곡에서 인생은 더욱 밝게 빛난다

김재식 지음, 이순화 그림, 위즈덤하우스(2013)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김재식#희귀난성성질환#간병일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