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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절이 있었다. 음악을 들으려면 부드러운 융으로 LP판을 닦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눈을 바늘 끝에 고정한 채 살그만히 내려놓아야 하는.

오래 들은 판에서는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나기도, 도돌이표를 하듯 제자리서 펄떡펄떡 뛰면 재빨리 뛰어가 바늘을 다음 곡으로 옮겨놓는 수고를 하기도 했지만, 그렇기에 음악 듣기가 더 소중했던 시절이었다.

얼마 뒤였을까. 전축(오디오)보다 덩치가 작은 녹음기(카세트)가 보급되면서 음향의 질은 떨어졌지만, 이동이 편리해 어디서든 음악 듣는 게 쉬워졌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심지어 이른바 '워크맨'이라는 특정회사의 브랜드로 통칭되던 휴대용 카세트가 나온 뒤로 카세트테이프는 음악을 담는 매개체로 발전의 '끝판왕'인 듯했다.

마음대로 녹음이 가능하고, 지운자리에 다시 녹음하며, 테이프가 늘어지거나 감겨 끊어지지만 않으면 '반영구' 상태로 음악이 저장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사진 찍을 줄 알았으면 오늘 들어온 화려한 컬러 기타 좀 전시할 걸." 방철구 사장이 기타의 종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찍을 줄 알았으면 오늘 들어온 화려한 컬러 기타 좀 전시할 걸." 방철구 사장이 기타의 종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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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CD시대를 거쳐 디지털음원 시대에 접어들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보다 깨끗한 음질'을 자랑하는 디지털 음원들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무한대의 성능을 자랑하는 초미니 기기들에 담겼다. 

그 사이 동네마다 한 두 개는 있던 음반가게들이 줄지어 문을 닫더니, 이제 충남 예산군에는 '재성사'만 유일무이하게 남았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파는 곳, 3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예산 주민들의 낭만과 함께 해온 음반·악기전문점이다.

충남 예산에서 유일한 '음반가게'

"소리의 느낌이 전혀 달라요. 디지털 음원의 음질이 깨끗할지는 몰라도 감성적이지는 않다잖아요. 그 뭐냐... 파장 실험에서도 밝혀졌다던데..."

'소리가 있는(재성-在聲) 집'이라는 의미로 가게 이름을 지었다는 방철구(66)씨는 개업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1976년 3월 18일에 문을 열었어요. 그땐 예산에 음반 전문점이 없었죠. 테이프는 전파사나 냉장고 파는 데서 여벌로 취급했는데, 서울에 가보니 시장이 분업화되는 거예요. 당시만 해도 예산이 충남도내 3대 시장으로 꼽히던 때였기 때문에 가게를 낼 수 있었어요"

군 단위에서는 모험적인 악기·음반 전문점이었지만, 시장의 흐름과 예산 사람들의 취향을 읽는 눈은 적중했다.

 요즘 누가 노래를 카세트로 듣나 싶은데, 일부러 찾는 손님들이 꽤 된다고 한다. 장르는 주로 트로트. 약 1000여개의 카세트테이프들이 한쪽 벽면에 빽빽이 꽂혀있다.
 요즘 누가 노래를 카세트로 듣나 싶은데, 일부러 찾는 손님들이 꽤 된다고 한다. 장르는 주로 트로트. 약 1000여개의 카세트테이프들이 한쪽 벽면에 빽빽이 꽂혀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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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여년 전 재성사. 방철구 사장과 두 아들 뒤로 LP판이 진열돼 있는 모습이 아날로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30여년 전 재성사. 방철구 사장과 두 아들 뒤로 LP판이 진열돼 있는 모습이 아날로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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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광고판거리(청우체육사 맞은편) 목공소 옆 작은 공간을 빌려서 시작해, 3년 만에 현재 삼산약국 자리에 있던 완구점 옆으로 이사를 했고, 다시 2년 만에 현재 건물을 매입해 정착했다. 개업 5년 만인 1980년에 자기 소유의 건물을 갖게 됐으니, 개인적으로도 성공이려니와 당시 예산지역 문화산업이 얼마나 성했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옛날에는 더 낭만이 있었어요. 중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이태리, 독일 가곡 몇개는 배웠고, 클래식 음악들도 익혔으니…. 고등학생이 되면 겉멋으로라도 기타를 갖고 싶어 하고 그러다보면 한 두 곡쯤은 코드를 잡을 줄도 알았죠."

재성사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기타 한 대 값이 3500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쌀 한가마에 5000원이었으니 결코 싼 게 아닌데도, 어떻게든 기타 한 대 갖는 것이 청소년들의 로망이었다. 오프라인 음반시장이 살아있던 1990년대까지는 말 그대로 '재성사 전성기'였다.

"예산군에서 들고 다니던 '워크맨'은 모두 우리집에서 샀다고 봐야 해요. 물론 다른 데서 산사람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많이 팔았다는 얘기예요. 처음 나왔을 때 30만~40만 원하던 게 나중에 경쟁이 되면서 10만 원대까지 떨어졌었지, 아마."

대를 이어 찾아오는 손님들

강산이 세 번 변하고 네 번째 변화하는 시점에 이르는 세월 동안, 그 많던 후발 주자들이 부침을 거듭하다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재성사만이 예산 사람들의 살아있는 추억으로 존재하는 비결은 뭘까.

"장사는 앉아서 하면 안 돼요. 나는 발로 뛰어서 도매상을 발굴하고, 더 싼 가격으로 공급받아 마진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어요. 물론 음반시장이 달라지면서는 '마실꾼들 사랑방이다' 생각하고 지내요. 내 건물이니 망정이지 세 내야 했으면 나도 벌써 접었겠죠."

재성사의 주 고객은 벽면 한쪽을 꽉 채우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를 사러 오는 이들이다. 주인은, 디지털보다 아날로그 기계가 익숙한 동세대의 손님들을 위해 트로트 중심의 가요테이프들을 지금도 계속 들여놓고 있다.

 재성사 출입문에는 두자리 국번호가 아직 남아있다. 도청 예산유치운동을 하던 20여년 전 스티커도 그대로 붙어있다. 새롭고 산뜻한 것만 좋은 게 아니라,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이런 모습, 참 소중하다.
 재성사 출입문에는 두자리 국번호가 아직 남아있다. 도청 예산유치운동을 하던 20여년 전 스티커도 그대로 붙어있다. 새롭고 산뜻한 것만 좋은 게 아니라,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이런 모습, 참 소중하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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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저씨 저 학생 때 여기 단골이었어요"라면서 자녀의 손을 잡고 악기를 사러 오는 옛 고객들도 있다. 방 사장은 "대물려 오는 손님이 제일 고맙"기에 반드시 깎아주게 된다고 한다.

"참 신기한 게 부모가 음악을 좋아하면 애들도 틀림없이 좋아해요."

그렇다고 재성사가 한물간 추억의 장소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기타를 비롯해 드럼, 오카리나. 색소폰, 플릇, 바이올린, 하모니카, 우클렐레, 단소, 피리 등 많은 악기를 취급하고 있다.

"사람들은 내 분위기가 그렇진 않다고들 하는데, 내가 원래 음악이랑 악기를 좋아해요. 그러니까 여태까지 하지, 안 그러면 이렇게 오래 할 수 있간요?"

예산읍내 중심상가에 자리한 재성사의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다. 명절이나 특별한 개인사정이 있는 날이 아니면 "빨간날에도 문을 여는 연중무휴업체"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재성사#음반가게#테이프#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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