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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의 방은 막다른 방
이제 나의 방의 옆방은 자연이다
푸석한 암석이 쌓인 산기슭이
그치는 곳이라고 해도 좋다
거기에는 반드시 구름이 있고
갯벌에 고인 게으른 물이
벌레가 뜰 때마다 눈을 껌벅거리고
그것이 보기 싫어지기 전에
그것을 차단할
가까운 거리의 부엌문이 있고
아내는 집들이는 한다고
저녁 대신 뻘건 팥죽을 쑬 것이다
(1964. 9 .10)

어느 여름이었다. 수도국에서 사람 하나가 집으로 찾아왔다.

"가족이 모두 몇이오? 혹시 집에 세 든 사람은 없소?"

수도 계량기 검사원이었다. 수도 요금을 받으러 왔나 싶었다. 그런데 묻는 품이 이상했다.

"뭣 때문에 그런 걸 코치코치 물으시오?"
"수도가 이번 달에 아주 많이 돌아갔어요."

수영은 여름철이라 빨래나 목물이 잦아 그렇겠거니 여겼다.

"여름이라 물 많이 쓰지요. 그나저나 대체 계량기가 얼마나 돌아갔어요?"
"돈으로 환산하면 모두 2600원이오."

전달까지 매달 내는 수도요금이 100원 정도였다. 그런데 2600원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검사원은 수영을 계량기가 묻힌 마당가로 데리고 갔다. 뚜껑을 열어 속을 보여 주었다. 검사가 틀림없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했다. 수영은 속이 뒤틀렸다.

"에이 여보쇼. 한 달 100원 내던 집에서 어떻게 갑자기 26배나 많이 물을 쓴단 말이오. 계량기가 이상한 거지."

고함을 빽 질렀다.

"무슨 말이오.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기계까지 못 믿으면 어떻게 하오."
"됐으니 나가시오. 내가 수도국에 직접 알아보리다."

물값 폭탄의 진실은 수영이 수도국에 가기 전에 수월하게 밝혀졌다. 그전 검사원의 잘못이었다. 지난 겨울 뒤로 계량기를 들여다보지 않고 기계적으로 사용량을 매달 똑같이 매겨 놓은 것이다. 2600원은 그 사이에 세 든 네 가구가 쓴 누적 사용 금액이었다.

그다음 날, 수영은 우연히 집 앞을 지나가는 검사원을 붙들었다. 화해를 할 요량으로 막걸리 잔을 나누었다. 그렇게 화해를 한다고 했으나 그의 기계 절대주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말을 귀에서 닦아내야 할 듯싶었다. 수영은 술김에 이발소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삭발을 했다.

수영은 뜬금 없이 삭발을 하곤 했다. 제법 큰일이 일어났거나, 마음에 걸리는 어떤 일을 겪고 난 뒤에 그랬다. 5·16 직후도 마찬가지였다. 1주일간 스스로 행방불명 된 수영은 머리를 빡빡 민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빨갱이 콤플렉스로 인한 공포에 맞서는 그만의 소심한 대처법이었으리라.

수영은 수도 계량기 검사원의 기계 절대주의가 기가 막혔다. 인간이 만든 기계를 인간보다 더 믿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라니. 그는 시인이었다. 시인인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이었다.

<이사>에서 수영은 "막다른 방"(1행)으로 이사를 했다. "옆방은 자연이다"(2행). "푸석한 암석이 쌓인 산기슭"(3행)을 배경으로 어우러진 주변을 보면 풍광이 시원찮은 곳이다. 하지만 그는 그곳이 '좋다'(4행). '구름'(5행)과 '물'(6행)이 있고, "눈을 껌벅거리"(7행)는 '벌레'(7행)가 있다.

그곳에는 흙과 풀도 있을 것이다. 기계를 못 믿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따위의 말은 들을 수 없는 곳이리라. 수영은 그런 세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옆방은 자연"인 곳이 거처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세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막다른 방"이 "이제 나의 방"(1행)이 된 것은 자연스럽다.

수영은 탈속을 꿈꾸었을까. 가난 속에서도 유유자적하며 전원의 즐거움을 누리는 안빈과 낙도의 삶을 바랐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좀 더 꼼꼼히 살펴보자. '그렇다'고 말하고 말기에는 석연찮다.

먼저 '공간'의 문제가 있다. 그는 아직 완전한 '탈속'의 공간으로 가지 않았다.('못했다'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이야기한다.) 그의 '방'은 "막다른 방"이다. '속(俗)'을 완전히 벗어난 곳이 아니다. 주변 풍광도 시원찮다. "옆방은 자연"인 곳이라지만, "푸석한 암석"은 유토피아로서의 이상향적인 자연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다음은 '태도'의 문제. 수영은 분명 '구름'과 '물'과 '벌레'를 이야기한다. 그것들을 보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언젠가는 "보기 싫어"(8행)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그 전("보기 싫어지기 전")에 "그것을 차단할 / 가까운 거리의 부엌문이 있"(9, 10행)곳으로 온 것이다.

미묘하다. 왜 그런가. 무언가를 보는 일은 즐겁다. 언젠가는 그 일이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 보는 일의 즐거움은 계속 간직하고 싶다. 그래서 싫어지기 전에 스스로의 눈을 차단한다. 이런 모순적인 태도가 시상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수영은 사람보다 기계를 더 믿는 삭막한 세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막다른 방"은 그런 한계의 증언이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주의자로서의 수영의 모습을 생생히 증명해 준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수영이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계를 벗어난 곳에 있는 '자연'이라는 곳도 그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서가 아니었을까. 그 탈속의 공간이 실은 안식처가 아니라 도피처처럼 다가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수영은 서강 집에서 닭을 기르고 채소를 가꾸었다. 흙과 땀의 의미, 노동의 가치를 잘 알았다.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기계 절대주의가 지배하는 세상, '삭발' 따위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무서운 세상을 피해 "막다른 방"으로 '이사'를 했으면서도, 한 발만 더 걸치면 갈 수 있는 '자연'으로 넘어가지 않은 이유다. 일상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수영 특유의 현실주의도 이런 역설의 논리 속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이사>#김수영#현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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