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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개봉해서 화제를 일으킨 영화 <다크나이트>는 히스 레저의 조커 연기가 단연 압권이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배트맨이 보여주는 시원한 액션과 더불어 절대악과 절대선이 없는 상황의 조합은 단순한 영웅물을 넘어서 더욱 무게감을 지닌 영화를 보여주었다. 더불어 실성한 듯 미친듯이 웃다가도 금세 정색하여 배트맨과 고담 시민들을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으로 끌어들이는 조커의 모습은 관객들을 홀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조커가 걸어왔던 게임 중 묘미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이었다. 고담시를 통째로 공포에 몰아넣고, 누구도 손쓰지 못할 정도의 혼란으로 밀어넣는 장면. 조커는 "이 도시는 내 것이다. 살고 싶으면 고담시를 떠나라, 그러나 육로를 이용하면 큰일날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어느 한 쪽이 그 버튼을 누르면 그 배의 승객들은 살려주지"

그것은 당연히 함정이었다. 두 척의 대형유람선을 이용해서 '섬'으로 된 도시 바깥으로 시민들을 대피시키려던 계획을 노리고 파놓은 함정. 조커는 수만 명을 태운 유람선에 폭발물을 가득 싣고, 각각 다른 배의 폭발을 일으킬 기폭장치를 두 배의 승객에게 쥐어준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게임의 룰을 설명한다.

"오늘밤 여러분은 모두 사회 실험에 참가하게 되는거야. 나는 당장에라도 여러분을 하늘높이 날려버릴 수 있지. 누구라도 배에서 내리려고 했다간 모두 죽어. 너희에겐 각각 다른 쪽 배를 날려버릴 수 있는 리모컨이 있어. 자정이 되면 다 폭파시키겠어. 하지만 어느 한 쪽이 그 버튼을 누르면 그 배의 승객들은 살려주지. 그럼 어느 쪽이 살아남을까? 빨리 결정하는게 좋을거야. 다른 쪽 배의 승객들이 그다지 고상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자정을 20분 정도 남긴 상황. 두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혼란과 공포에 사로 잡혀 "얼른 버튼을 누르자!"며 고성을 지른다. 목숨이 걸린 위험 앞에서 누구나 느끼는 당연한 감정과 반응일 것이다. 이대로 한 쪽의 배가 스스로 살아남자고 버튼을 누르면, 악랄한 조커의 승리가 된다.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자발적으로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기 시작하면서 유대감과 정의감 따위는 모두 붕괴할테고, 도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두 척의 유람선 중 하나는 죄수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쪽은 고담시의 선량한 시민들이다. 그들로서는 "저 쪽 배의 죄수들은 이미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이야"라고 주장하기 쉽고, 따라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는 행위가 정당하다는 착각을 하기 쉬운 상황이다. 실제로 평범한 개인 그 누구도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리는 없는데도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자신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지 생각해보자. 아마도 살고싶다는 생각이 가장 강하게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다른 쪽 배에 탄 많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삶을 내가 순식간에 앗아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하는 지점까지 발상이 닿지도 않을 것이다. 그 전에 '생존'의 본능이 당신을 강력하게 휘감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탈출구는 매우 간편하게 마련되어 있다. 버튼을 한번 꾸욱 누르면 불꽃놀이같은 광경이 펼쳐질 뿐이고, 사람들의 살점이 화염에 휩싸여 산산조각 나는 것은 시야에 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매혹적인 거래인가?

영화에서는 다행히 어느 쪽도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감독은 이 지점에서, 정의감에 불타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과도한 설정을 하지 않았다. 이 소름끼치는 광경을 직접 지켜보라는 듯이 관객을 밀어넣고는, 억지로 감정을 쥐어짜내지 않고 묵묵히 버튼위에서 손을 내려놓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줄 따름이다. 조커를 포함한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 누구도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전율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나서 몇년이 흘렀다. 그리고 최근, 이런 설정의 배경이 '만약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해보았다. 영화 속의 짜릿한 결말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버튼을 누르지 않고 서로의 안녕을 생각하며 같이 생존하게 되었을까?

쉽게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최근 정부와 여당의 행태를 보면 오히려 반대의 대답이 더욱 강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상황이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여당 소속 정치인을 비판하면 쉽게 '종북세력'으로 낙인 찍히는 오늘 아니던가. 전교조는 학생들을 세뇌시키는 '불순세력'으로, 민영화에 반대하는 철도노조는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파업하는 '귀족노조'로 몰아가는 일에 올 한해를 다 보낸 보수언론과 새누리당이었다.

두 척의 배에 수많은 한국인들이 타고있고, 서로의 배를 폭파시킬 버튼이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이라면 어떨까? "반대 쪽 배에 종북세력이 타고있다!"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라면, 진위여부의 판가름 없이 누구든 쉽게 버튼을 누를지도 모르는 것이 요즘 분위기 아닌가. 무서운 것은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지성인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2013년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국민을 상대로 한 정부의 낙인찍기는 과연 언제 끝이 날까? 물론 현실에서 한국의 정부가 영화 속의 악당처럼 미치광이 살인마도 아니고, 절대적인 악으로 간단하게 규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성급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오히려 위험천만한 일이다. 본인의 정당성을 위해서 타인을 악마로 붉은 칠하는 일이야말로 악질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도 알고있을까? 그것이 국민들을 상대로 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청춘기자상' 응모기사입니다.



#다크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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