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소풍 가장 가까운 장소라는 이유로 너무 많이 가서 미움을 받은 소풍지 반바위
소풍가장 가까운 장소라는 이유로 너무 많이 가서 미움을 받은 소풍지 반바위 ⓒ 이소영

타임머신을 타고 1985년을 여행하고 왔다. 만화 '이상한 나라의 폴'에서는 구멍을 통해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나는 밴드라는 구멍을 통해 1985년의 세계로 들어갔다. 니나를 찾아 헤매던 4차원의 폴이 아니라 어릴 적 친구들을 찾아 헤매는 41살의 초딩이 되었다.

밴드는 다시 우리를 4차원에서 끌어내어 현실에 모이도록 했다. 평택 안중초등학교 86년 졸업생들. 이 현실의 공간으로 불러들여지기 전 밴드 속 사진을 탐색하여 친구들의 신원 확인을 거친 뒤였지만, 모임 장소에 신랑, 신부 입장하듯 들어오는 친구들을 대번 알아볼 수는 없었다. 드륵 열리는 문, 순간의 탐지, 으으음... 생각. 아, 정구! 반가움.

유난히 키가 컸던 정구였다. 1985년 6학년 국어시간, 시를 쓰라는 선생님 말씀에 그 친구는 이렇게 시를 써서 발표했다.

"그 누구인가 내게 다가와 나를 바라보는 애닮은 눈동자/아픈 마음에 홀로걸으면/겨울비 내려와 머리를 적시네......"

그랬다. 유행가 가사를 자기 시인양 써 놓고 당당하게 발표하여 교실을 웃게 했던 정구. 졸업을 앞둔 6학년 겨울 김범룡의 겨울비가 히트를 치고 있었다.

다음은 삐삐 선희. 너무 빼빼 마르고 키가 컸던 삐삐. 심지어 나와는 유치원까지 함게 다녔던 삐삐. 온 학교를 휘젓고 다녔던 왈가닥. 학교에서 날아다니지 않았나 싶은 착각까지 불러 일으켰던 아이. 이 아이가 30년 후에도 이 자리를 휘저으며 날아다니고 있다. 역시 삐삐다.

우리 동네서 또래가 없던 나는 함께 집에 갈 친구가 없었다. 그 당시 안중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5~6개반, 전교생이 1800명이었던 주변에서 가장 큰 초등학교였다. 오전 7시에 집에서 나온 수촌에 사는 아이들은, 8시쯤 집에서 나온 나와 마주치곤 했다. 나는 그나마 학교에서 1km 떨어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살았다. 언니 동생들과 함께 등교하는 아침은 외롭지 않지만 하굣길은 왜그리 외로웠던지, 방향만 같았고 길이 달랐던 덕우리 사는 친구들을 따라가다 중간에서 산길을 돌아 온 적이 많았다.
 
덕우리 삼총사, 그때가 그립다

남정이 현미, 정숙이 덕우리 3총사. 1~3학년 때까지 같은 반이었던 이 아이들과 난 특별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비오 날 일부러 우산을 버리고 웅덩이를 골라 뛰어다녔다. 초등학교 3학년 그 비오던 날, 나의 오로움은 극에 달했는지 나는 이들을 따라 덕우리까지 가 버렸다.

1시간 여의 끝없이 펼쳐질 것 같던 논밭 길이 끝나고 마지막에 나온 산길을 넘어가자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동화 속 마을이 나왔다. 기와집들이 있는 덕우리. 이제 친구들은 자기 집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없었다. 나는 다시 돌아가야 했다. 혼자서. 친구 집에 놀러가기 위해 따라온 것이 아니므로, 친구가 날 초대한 것이 아니므로 나는 뒤돌아서 내길을 가야 했다.

내가 덕우리까지 따라가는 것을 친구를은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 내 기억에 마을 초입까지 간 후 세 친구 중 한 명이 나를 다시 동네 바깥까지 데려다 줬고 나는 혼자서 1시간여를 걸어 집으로 왔다. 20분 혼자 걸어가면 될 것을 친구들과 함께 가기 위해 나는 혼자 1시간 30분을 걷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오늘 그 남정이가 거기 있었다. 나의 외로움에 길동무가 되었던 괄괄한 성격의 남정이, 무척 예뻐져서 처음에 못 알아봤던 남정이.

지각의 핑계로 멀리 수촌 산다고 잔머리를 굴렸던 친구 박종경, 종경이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인 우리 집 뒤쪽에 살았다. 같이 다니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뭐라고 남자끼리 놀고 여자끼리만 놀았는지...지금은 웃음이 나온다.

살면서 문득 문득 생각났던 또 다른 친구가 하나 있었다.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내겐 좀 각별함으로 다가왔다.

나와 고민을 나누던 그녀, 어떤게 진짜 모습일까

5학년 때인 것 같다. 그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안중에서 만나 우리 집으로 가기로 했는데 그 아이의 손에는 '종합선물세트'속에 들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과자봉지가 들려 있었다. 얘가 부자인가? 그렇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좋으면서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자의 양만큼 이 아이에게 특별한 것 같은 뿌듯함과 약간의 부담이 생기는 야릇한 느낌이 있었다. 우리는 이 날 속 깊은 이야기도 하고 해 지기 전까지 즐겁게 놀면서 절친이 됐다.

6학년이 되어 반이 갈리면서 이상하게도 이 친구와 소원해졌다. 중학생이 되었다. 교실 뒤 수돗가. 수압이 너무 세서 무심코 틀면 실내화가 다 젖는 그런 수도였다. 그날 내가 무심코 수도를 세게 틀었던 것 같다. 내 신발 뿐 아니라 뒤돌아 앉아 있던 어떤 친구의 신발에까지 물이 튀게 되었다. 그 친구의 입에서 갑작스런 쌍욕이 튀어나오며 누구냐며 날 째려 보았다. 그 아이였다. 엄청난 과자를 사들고 우리집에 놀러와 고민을 털어놓았던 그 친구.

나는 만약 나라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미안해. 나 소영이야. 나야 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싸늘한 눈빛과 욕 한마디를 던지고 그 친구는 가 버렸다. 중 3때는 야한 노래를 공개적으로 불러 아이들을 뒤집어 지게 했고 학교서 유명하다는 일진과 어울려 다니며 나와는 말하는 일이 없어졌다.

오랜 시간 나는 이 아이를 머릿속에 넣어 두고 살며 많이 궁금해 했었다. 어떤 모습이 진짜 이 친구일까? 마지막 모습들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 집 이층 침대에서 나란히 엎드려 고민을 나누었던 모습? 아니면 내게 욕했던 모습? 무엇이 이 친구를 변화시켜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을까,  도대체 왜 나는 지금까지 이 친구를 생각할까?

저녁식사를 마치고 2차로 간 노래방에서 예쁜 눈의 친구가 왔다. 나를 보자마자 '칫'하면서 밴드의 자기 글을 씹었다고 무척 서운해 했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오는 밴드의 댓글들을 어떻게 다 보겠냐며 미안하다고 하자 그제서야 내가 일부러 무시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는 지 운을 뗀다.

우리집에 2층 침대가 있었고 그 옛날 시골 촌구석에 현대식 거실구조처럼 방 바로 옆에 화장실과 개수대가 있었던 우리집이 인상적이었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누구지? 누구지? 우리 집이 외딴집이라 친구들이 많이 오지 않았는데 도대체 이 아이가 누구지?' 미안한 고민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녀였다.

한보따리 과자를 사들고 온 바로 그 친구, 한윤희. 대뜸 나는 "너 생각났다. 너 그 과자!" 중학교 때 있던 일을 얘기하고 "너 그 때 왜  방황했니?" 하고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 마치 내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듯 대했다.

하지만 아빠가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셔서 돈을 많이 벌어오셨기 때문에 용돈이 풍족해서 과자를 많이 살 수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나머지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수돗가 그 사건도, 야한 그 노래도.... 다만 일진들과 어울렸던 사실과 주변에서 "그래, 너 탈선 했었어"라고 놀리는 친구의 증언으로 한때 살알짝 방황했던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중학교 이후 그 친구에 대한 걱정과 궁금증을 모두 풀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감사한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어떤 모습이 윤희의 진짜 모습일까 궁금해 했던 나에게 평범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좋은 모습이 진짜 그 친구라는 답을 얻을 수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윤희도 내가 늘 생각났다고 한다. 이사 갈지도 모른다고 슬퍼하는 자기에게 부모님을 잘 설득해서 이사가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가 늘 생각하고 있었다니 서로 끌리는 것이 있긴 했나보다.

'우리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솔직한 계동이

도덕 시험으로 기억되는 계동이. 계동이는 '우리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이라는 문제의 답을 '3번 잠자고 있을 때'라고 고르고 자기가 왜 틀렸냐고 억울해하던 친구였다. 그 문제의 보기들에는, 1번. TV를 볼 때 2번. 가족과 함께 있을 때. 3번 잠잘 때 4번.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이런 것들이었다.

나도 이 문제에 '저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입니다'라는 모범 답안을 골라 놓고 진짜 정답은 버려야 했었다. 하지만 계동이는 눈치없이 진짜 정답을 선택했다.

선생님의 정답을 거부했던 이 순진한 아이는 우리 중 가장 시험을 많이 보았을 박사가 되어 우리 앞에서 점잖게 웃고 있었다. 그 이후로 이 친구가 맞춘 정답은 아마도 정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친구의 정직함과 순진함은 삶에 실려 계속 우리가 알았던 그 계동이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41살의 초딩들, 밴드의 구멍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다

단체 사진          경훈이 어머니가 운영하시며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던 진미식당에서 우리 모두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단체 사진 경훈이 어머니가 운영하시며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던 진미식당에서 우리 모두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 이소영

나의 유치원까지 동창인, 지금은 가장 열정적인 은식이, 깔칠한 귀욤이었던 재상이는 사장 포스를 풍기며 나타났다. 자신은 절대 아니라지만 많은 여자 친구들에게 고무줄 끊던 아이로 기억된 충현이, 우리 학년 유일의 일란성 쌍둥이 동배, 30년 전에도 무척 순수하고 아기 같았던 인숙이. 인숙이는 숲교사가 되어 나타났다.

여전히 귀여운 연숙이. 6학년 때 전학갔지만 어린 시절 보냈던 안중과 친구들이 그리워 무작정 안중에 몇 번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던 잘 생긴 승영이. 호, 재환, '난 일주일 외박해도 된다'라고 하는 당당하기 그지 없는 현숙이. 동열이 진철이 은호, 보고 싶으니 동창회에 꼭 나오라던 원희. 가장 아쌀한 성격을 가진 은희.

야, 너로 호칭되는 우리 41살 초딩들은 새벽 2시를 찍고서야 밴드가 만들어준 구멍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그 순간 우리 모두는 2013년 41살 중년으로 나가는 구멍을 잊고 싶어했다.

내 기억속에는 없었던 오늘의 이 자리를 만들어준 총무 경숙이. 모임 시작하자마자 회비를 먼저 챙기면서, "끝까지 가는거야"를 연발하더니 12시 넘어 마지막 장소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혼자 2013년 가정주부의 세계로 건너가 투명한 벽 밖에서 내게 물었다.

"집에 안가니? "

아니 어쩌면 경숙이는 30여명의 초딩들을 챙기는 선생님으로 같은 세계에 있었다는 것이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한달전부터 준비하던 오늘 하루를 잘 마치기 위해 41살 초딩들을 무사히 얼른 귀가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회비 걷고 정산하고 다음 이동장소를 고민하는 초딩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우리 31명은 밴드와 경숙이 선생님 타임머신 덕에 하룻 밤 나이를 잊고 진짜 초등생이 되어 1985년을 맛볼 수 있었다.

돌아오는 다음날, 오늘도 달린다며 해장 하자는 경훈이와 진철이는 기어이 은희와 윤희 재연이까지 합세하게 하고 푸짐한 굴요리 술상을 밴드에 올려 그 자리에 갈 수 없는 나에게 염장질을했다.

그리웠던 친구들, 아 하니 30년이 흘렀다. 꽃피는 봄에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아직도 그 여운에 취해 오늘 밤 딱 한잔만 해야겠다.


#안중초등학교 61회졸업생#동문회#밴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