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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의 시인 김수영(1921~1968)은 '시인들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대표적인 현대 문인입니다. 그는 해방 직후 연극에서 시로 전향했습니다. 문학으로 전향한 뒤, 그의 시가 실린 첫 지면은 당시 보수적인 문예지로 분류되던 <예술부락>이었습니다. 문학평론가 조연현(1920~1981)이 주간하던 잡지사였습니다. 경남 함안 출신이던 조연현은 '우파' 성향의 민족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평론을 썼습니다. 말하자면 보수파 문학인이었습니다.

수영의 산문 중에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1965년에 쓰인 글입니다. '나의 처녀작'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의 결미에서 수영은 제대로 된 현대성을 갖춘 자신의 진정한 현대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문학으로 전향한 후 20여 년간 이어진 자신의 시력을 중간 결산하자는 취지에서였습니다. 수영이 자천한 현대시의 출발은 1956년 작품인 <병풍>이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담담하게 풀어낸 작품이었습니다.

공교로운 것은 이 작품이 실린 지면이 주간 조연현, 편집장 오영수 체제로 유지되고 있던 <현대문학>이었다는 점입니다. 시기적으로 첫 작품인 <묘정의 노래>와 현대시의 본격 출발을 알린 <병풍>이 모두 보수파 문인 조연현이 주간으로 일하던 문예지에 실리게 된 것입니다. 수영은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시기를 전후로 대놓고 좌나 우를 표방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즈음의 그의 삶이나 이후 펼쳐지는 행적을 보면 '왼쪽'이나 진보 쪽에 가깝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우파' 조연현이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자적인 성향의 '좌파' 수영을 실제로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영의 주요 작품을 그가 주간하던 문예지에 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평가의 일단을 점쳐 볼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런 사실만을 고려하면, 적어도 이들 둘의 관계는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당대 문학판의 현실과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유신 말고 현대소설을 달라는 <현대문학>, 이제하 소설 연재 거부

수영의 본격적인 '현대시의 출발'을 널리 알린 <현대문학>은 '신인추천제'와 '현대문학상' 등을 통해 많은 작가를 배출했습니다. 1955년에 출범한 이후, 이른바 '순수문학' 진영을 대표하는 문예잡지로 굳건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표 잡지가 이번에 일을 제대로 저질렀습니다. 원로 소설가 이제하 작가의 소설을 모종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연재 거부하기로 결정한 의혹 사건에 휩싸인 것입니다.

 작가 이제하
작가 이제하 ⓒ 이제하
저간의 사정은 이렇습니다. 이제하 작가는 내년 1월호부터 한국으로 귀화한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일어나라, 삼손>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이 작가는 연재 1회분으로 원고지 100여 매를 써서 넘겼습니다. 그런데 지난 12월 2일, '연재 거부'라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을 전하던 편집 담당자는 이 작가에게 위에서 현대소설을 바란다, 미래 지향적인 뭐라고 우물쭈물하면서 몹시 미안해했다고 합니다. 편집자의 '미래 지향적인' 운운의 말에 이 작가는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거 진행형인 현대가 배경인데요. 안 읽어 보셨어요?"

그렇게 몇 마디 하다가 얼떨떨해서 입을 다물었다고 합니다. 1회분 배경에 '박정희 유신'과 '87년 6월 항쟁'이라는 시대배경을 서술하는 단어 두 개가 들어간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로 작가의 심경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시는지요. 이제하 작가는 원래부터 이른바 '정치성' 짙은 소설을 쓰는 작가도 아니었습니다. <현대문학>은 이런 사실과 관련,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이 건에 대해 해줄 말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현대문학>의 행보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12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현대문학>은 지난 9월호에 박근혜 대통령의 수필을 찬양한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의 '바른 것이 지혜이다'를 게재해 논란을 불렀습니다. 그 '박비어천가' 비평문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평론가 양경언씨의 격월평문 '시의 정치성'은 <현대문학> 양숙진 주간의 의견에 막혀 문제의 부분이 빠진 채 11월호에 실렸습니다. 소설가 정찬씨는 지난해 12월 <현대문학>에서 장편 연재 요청을 받고 올 10월호부터 연재를 하기로 했는데 9월 초 1회분 원고를 보낸 지 10여 일 후 양 주간의 이메일을 받았다고 합니다.

"<현대문학>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잡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가시화된 작품을 다루지 않았다. 다른 잡지에서는 문제가 안 될 수 있지만 <현대문학> 연재물로서는 문제가 된다."

정 작가가 실으려고 하는 소설은 1970~19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인물들의 회고담으로, 이들의 눈을 통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빛난 문학적 유산이라 할지라도 본지는 아무 반성 없이 이에 복종함을 조심할 것이며, 아무리 눈부신 새로운 문학적 경향이라 할지라도 아무 비판없이 이에 맹종함을 경계할 것"

<현대문학> '창간사'의 일부입니다. 기존 문학의 권위나 시류에 대한 맹종을 경계하는 멋진 문구입니다. '우파' 문인 조연현이 권위를 혐오하던 '좌파' 시인 김수영의 작품을 기꺼이 받아들인 저간의 진실을 이 창간사에서 엿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요.

'죽음의 문학'이 결코 끝나지 않는 이유

여전히 '순수문학'을 들먹이며 이른바 정치적 편향성을 경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조지 오웰(1903~1950)은 1946년에 발표한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에서 '글을 쓰는 네 가지 가장 중요한 동기'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 네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4. 정치적 의도 :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가 정치성을 띤 태도다.

 <현대문학> 12월호
<현대문학> 12월호 ⓒ
<현대문학>은 저열한 방식으로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순수문학' 운운하며 작가들의 '정치성'을 과도하게 문제 삼고 있습니다. 2010년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시인 황인찬씨가 한 말을 새겨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젊은 작가들이 모여 (<현대문학> 기고를 거부하는 등의 성명서를 내는-기자 주)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건 분노에 앞서 민망한 일이다."

김수영은 시인의 스승이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산문 <창작 자유의 조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시고 소설이고 평론이고 모든 창작 활동은 감정과 꿈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과 꿈은 현실상의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상으로는 38선이 있지만 감정이나 꿈에 있어서는 38선이란 터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너무나 초보적인 창작활동의 원칙을 올바르게 이행해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문학을 해 본 일이 없고 우리 나라에는 과거 십수 년 동안 문학 작품이 없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1962년,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의 공포정치가 본격화한 시기에 내지른 수영의 일갈이었습니다. 이런 저항의 용기를 가진 이들이, 오늘날 문학인 중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스스로 알아서 대통령의 '심기'를 조심하고, 그를 '최고 존엄'처럼 대우하는 이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른바 '문학의 죽음'은 결코 끝이 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김수영은 또 다른 글(<시의 뉴 프런티어>)에서 '우리들은 과연 그동안에 문학의 권위와 문학자의 존엄을 회수할 수 있었던가'라고 심각하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양 주간에게 묻습니다. <현대문학>은 과연 그동안에 문학의 권위와 문학자의 존엄을 회수해 왔던가요. '문학의 죽음'이라는 해묵은 비유어가 왜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권합니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이제하#≪현대문학≫#박정희 유신#김수영#조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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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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