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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 이후,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사건과 관련한 집회가 있었지만, '박근혜 대통령 사퇴'라는 구호까지로는 이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금기처럼 여겨지던 그 구호가 마침내 지난 22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의 사제들의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미사'에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른바 박창신 신부의 '연평도 포격' 발언을 빌미로 정부 여당과 청와대는 지금까지의 모든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사건'과 관련된 집회를 종북몰이할 기세로 달려들고 있으며 보수단체에서도 먹잇감을 만난 듯 가세하고 있다.

거기에 박근혜 대통령도 가세하여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연평도 사건을 거론하며, "국내외에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행동들이 많습니다"라며 "이런 일들은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진상규명 회피가 결국 '사퇴' 구호 낳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내외'라는 발언에는 최근 외국순방 때 가는 곳마다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사건에 항의하던 시위대(특히 프랑스에서의 시위)까지 싸잡아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행동'으로 규정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특이한 대목이다. 외국에서 벌어진 그 정도 시위에도 이 정도 인식이니, 국내에서 이뤄지는 '국정원 불법 선거개입 사건'과 관련된 집회 등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인식은 당연히 '환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기관의 전방위적인 선거개입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하는 국민의 요구를 이런 식으로 피해 가려거나 무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계속해서 지금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사퇴촉구'라는 구호보다도 더 험한 구호가 외쳐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국론이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기까지의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원인을 분명하게 직시하고, 그것에 대해 국민에게 진솔하게 사과를 구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국론분열이나 '대통령 사퇴'라는 구호가 외쳐지는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사건'과 관련해서 대선 기간부터 지금까지 일련의 행태들을 보면 국론분열이나 혼란을 야기한 세력이 누구인지는 분명해진다. 집권 여당이나, 청와대나 박근혜 대통령, 불법선거운동에 개입했던 관련 기관들. 그들이 국론분열과 혼란을 야기한 세력이 아니던가? 뻔히 드러나 국정원의 불법선거개입이 있었음에도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다른 정치적인 이슈들을 부각해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 하려 하고, 국민의 일반적인 정서에 반하거나 기본적인 법 상식에도 어긋난 일들을 지속해 왔다. 지난 대선 이후 거의 1년이 다 돼가는 시점까지.

역사에 '만일'은 없지만...

만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사건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 이 정도의 대국민 담화문이라도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본인이 의도하거나 지시하지 않았지만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이익을 얻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당락을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국가기관의 불법선거개입 사건이 있었던 만큼 책임자를 엄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대선 때 선거의 중립성을 훼손했던 국가기관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책임을 물어 차후의 선거과정에는 국민의 권리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이 정도의 담화문 혹은 사과나 유감 표명만 됐어도 이 문제는 이렇게 불거질 문제가 아닐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나 유감 표명은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새누리당을 통해서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이슈를 만들기에만 급급했다. 거기에 불통인사와 그들이 재임하면서 상식 이하의 돌출행동들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을 분노하게 했다.

황당한 질문, 대한민국 국민이 아닐걸요?

게다가 사회 곳곳에서 유신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현상과 종북몰이가 강화되면서 정당한 비판을 하는 이들조차도 종북좌파로 낙인을 찍은 것도 모자라, "당신들의 조국은 어디인가?"라는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해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적'으로 규정하고, 오로지 자신들만이 '애국자'인 듯 행세하는 세태를 조장하는 것이야말로 국론분열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점에서 국론분열을 조장하고 야기한 책임을 가장 크게 져야 할 집단은 집권여당일 것이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처음부터 사퇴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하자가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선거에 불복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불법적인 사안이 있었으므로 그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을 터이다. 그러나 불법적인 사안들이 명백하게 밝혀졌음에도, 그것이 빙산의 일각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진상을 은폐하려고 하는 데 분노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규명을 외치는 이들의 분노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작금의 국론을 분열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원인은 현 집권세력에 있다는 이야기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외피에 매달리며, 상대방의 흠집을 찾아 맹공을 날리며 물 만난 듯이 행동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미사에서 연평도 관련 발언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지만, 정부 여당이나 보수단체나 대통령이 인식하거나 해석하는 것은 너무 앞서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제들까지 북한추종 세력으로 몰고 가고, 당신들의 조국을 운운한다면 너무 유치한 발상들이 아닌가?

왜 그들이 퇴진 촉구 미사를 드렸는지 반성은 하지 않고...

왜 그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미사'를 드렸는지, 그 지경에 까지 왔는지 반성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이런 반성도 없이 연일 맹공을 쏟아놓는 여당과 보수단체와 거기에 가세한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서 국론분열과 혼란의 장기화가 이어질까 우려된다.

그런 인식 정도로는 지난 대선 이후 꼬여버린 매듭을 풀어낼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매듭을 도저히 풀 수 없다면, 한 매듭을 잘라버리고 새 출발 하는 길도 있지 않은가 싶다. 그 매듭을 잘라내려면 '국가기관의 불법선거개입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이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 그 결단만이 국민대통합의 시발점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묘연하다. 그것이 이 시대의 불행일지도 모르겠다.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국가기관이 국민분열을 심각하게 조장했음이 드러났음에도, 끊임없이 본질을 호도하려는 새누리당과 정부의 반성이 없다면 대국민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주교 사제단#연평도#시국미사#국정원 불법선거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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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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