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연전에 해남에서 오신 농부 부부가 '농사는 별의 노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래 '곡(曲)'자와 '별 진(辰)'이 합쳐져서 농사를 일컫는 '농(農)'자가 되었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이 부부의 말씀에 고개를 꺼덕였습니다. 별의 기운을 받지 않고는 결코 작물이 자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별의 기운은 바로 노래의 리듬으로 만물에 스밀 것입니다. 농부는 그 별의 노래에 따라 함께 신명의 춤을 추는 것이지요. 이제 올해는 그 춤을 잠시 그쳐야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서리가 내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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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자를 담은 들깨의 통꽃 자루들 사이에 아침의 햇살에도 녹지 않은 서리가 붙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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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에 올해 첫 서리가 내린 것은 10월 25일. 연약한 호박잎은 이 무서리에도 검게 말라버렸고 늦게 열매를 맺었던 애호박의 녹색 피부는 하늘하늘 녹았습니다.
농부는 된서리가 내리기 전에 이 모든 작물을 거둬들여야 합니다. 농부의 가을은 고개 들면 눈에 가득한 만산홍엽을 가슴에 담을 시간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2 모티프원 옆에서 대지를 텃밭으로 일구고 계신 도시농부 김성규 선생님의 발길도 잦아졌습니다. 대지에 깔린 이불처럼 펼쳐진 배춧잎도 묶어야하고 꼬투리가 벌어지는 쥐눈이콩도 따야합니다.
올해 처음 심어본 마는 땅위의 무성한 잎과는 달리 뿌리는 수확할만한 게 거반 없었습니다. '헛농사 였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얼굴은 '허허' 웃는 표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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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출에 관계없이 농부는 자연의 결과를 수용합니다. 텃밭을 가꾸는 도시농부인 김선생님에게도 그 농부의 심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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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농사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러 작물을 시도해보는 김 선생님 덕에 저는 절로 농사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3 김 선생께서 서울에서 오시는 날, 저는 아주 특별한 점심을 먹습니다. 김 선생님은 매번 사이참으로 콩통조림과 막걸리를 가지고 오시는데 꼭 2개씩입니다. 그중의 하나씩은 항상 제몫으로 내놓으십니다.
저는 오후 2시까지도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먹지 않은 상태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 선생님께서 오셨고 어김없이 삶은 콩 한 캔과 장수 생막걸리 한 통을 건네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요기를 대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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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삶은 콩 통조림과 생막걸리' 점심식사는 김선생님이 텃밭일을 하기위해 오시는 날마다 봄, 여름, 가을에 계속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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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기가 올랐습니다. 무엇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나른했지만 무엇을 감각하기에는 더욱 좋아졌습니다. 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나른함에 몸을 맡겼습니다. 정원에서 점차 붉어지고 있는 좀작살나무 잎이 이중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더욱 짙어보였습니다.
#4<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이생진 시인께서 시낭독을 하실 때면 압생트(absinthe) 술과 함께합니다. 스스로 귀를 자르게 한 발작증세를 유발했던 이 술은 이생진 시인뿐만 아니라 에두아르 마네, 기 드 모파상, 파블로 피카소, 애드거 앨런 포우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이 75도 술의 환각을 사랑했습니다. 아르튀르 랭보는 이 압생트가 가져다주는 취기야말로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라고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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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의 단풍나무가 온통 핏빛으로 변했습니다. 막걸리 점심으로 불콰해진 내 얼굴이 저 빛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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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이제 별의 노래에 맞춘 연주를 멈추어야하는 시기에 김 선생님이 건넨 막걸리가 압생트가 되어 저의 오후를 깨웠습니다. 서리가 칼날이 되어 호박잎을 죽이고 애호박의 껍질을 하늘하늘 시들게 하는 이 때 별의 노래가 더욱 쟁쟁하게 제 귀를 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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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리를 맞지 않은 애호박과 서리를 맞은 애호박(오늘쪽). 공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붙는 흰 얼음가루인 서리는 식물들의 세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백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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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죽음까지도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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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한 세대를 마감하고 검은 죽음으로 땅으로 돌아가고 있는 콩줄기와 콩깍지. 이 검은 색깔의 죽음을 보면 죽음도 삶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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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