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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가을이다. 10월을 앞둔 지금, 날씨는 선선해졌고 하늘은 드높아졌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많은 것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계절이다. 날씨도 그렇듯이 사람의 마음도 변해간다. 하물며 그런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들은 오죽할까.

체제라는 것은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소속된 집단이 만들어놓은 무언가를 말한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세계는 자연스럽게 '민주주의'가 가장 올바른 가치를 지닌 체제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대중을 위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소수 의견도 존중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민주주의 체제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방향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의 진보 성향 정치철학자로 알려진 셸던 월린은 이런 관점으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재조명하면서 문제점을 꼬집었다. 그가 쓴 책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후퇴하였고, 점차 '덜 민주주의적인 어떤 것'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친기업-반시민 행태 숨기고자 '안보 이슈' 이용한 부시 행정부

 셸던 월린이 쓴 책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의 표지.
셸던 월린이 쓴 책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의 표지. ⓒ 후마니타스
셸던 월린이 저서를 집필하던 당시는 조지 부시 2세가 대통령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부시 행정부가 사실상 9·11 테러사건을 계기로 그것을 발판삼아 '슈퍼파워'로 거듭나려고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정부가 무엇을 하든 정당성을 인정받는 도구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부시) 행정부는 9·11을 빌미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이 선포는 그 사건을 그리고 그 사건이 만들어낸 대중적 지지를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보증으로 전환시켰을 뿐만 아니라, 테러리즘을 전 세계적인 용어로 만듦으로써 제국적 권력의 동원을 정당화했고, 나아가 공포에 사로잡힌 시민들의 지지와 순종마저 이끌어 냈다."(본문 300쪽 중에서)

저자는 기업 권력이 국가로 주입되고, 시민들의 애국주의와 맹목적인 충성심이 혼합되는 과정에서 "미국인들이 민주주의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유형의 시민으로, 공포심과 그릇된 애국심에 지배적 형태의 권력을 더 잘 수용하고 지지하는 유형의 시민으로 반죽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포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미국의 시민들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틈을 타서 정치가 기업권력과 유착 되어가는 과정을 비판했다. 자본주의가 불순한 의도로 정치권력을 만나면서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9·11 이전 부시 행정부는 일반 시민을 위한 그 어떤 진지한 프로그램도 준비하지 않은 채 업무를 시작했다. 부시 행정부의 '대민 의제'는 단순하고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즉 정부 규제의 완화, 환경보호 장치의 제거, 부자를 위한 세법 개정안 통과,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축소 따위 말이다. 반면 석유·에너지·제약 분야 기업 스폰서들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부시 행정부가 긍정적으로 추진한 의제들은 교착상태에 빠진 정치와 기업 권력을 십분 활용해 진행되었다."(본문 183쪽 중에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부시 행정부는 정책수립에서 시민을 외면하고 오히려 기업을 돌보는 데만 애쓰며 친기업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로부터 시민의 관심을 돌려놓고자 테러사건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며 이용하였고, 급기야 국외의 테러집단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로 미국 정부가 점점 더욱 슈퍼파워의 면모(군사력을 키워가며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 동시에 국내에선 시민의 권리 규제를 강화)를 과시하면서 복지정책에 쓸 예산은 대거 축소하였고, '안보'를 국가가 가장 우선시해야 할 가치로 재인식시켰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도된 전체주의, 그 결과물은 '관리되는 민주주의'

이 지점에서 저자는 '전도된 전체주의'라는 가설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과거 히틀러의 나치 정권, 무솔리니와 스탈린의 정권이 '만장일치'를 외치라고 인민을 압박하는 '고전적인 전체주의'를 보여주었으나 오늘날의 미국은 이와는 다른 형태의 체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일당 국가 체제에서의 정치는 시민의 실천과 분리되고 정당 내에 국한됨으로써 사실상 '사적 영역화'되지만, 전도된 전체주의는 이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는 이야기다. 만장일치를 추구하는 대신 오히려 분열을 부추긴다는 것. 반대의 목소리는 (과거의 전체주의와는 달리) 제거되지 않으며 그 대신 중성화(혹은 무력화) 될 따름이다.

경쟁 정당의 존재를 허락하면서 민주주의로서의 구조적 면모를 유지한다. 그 덕분에 체제의 정당성을 이어가고 있지만, 사실상 '비자유적 민주주의'가 되었고,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나 단 하나의 주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만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와 같은 전환 - 사회민주주의의 폐기, 정치적 민주주의의 약화 그리고 이와 반비례해 나타나는 슈퍼파워의 영향력 증가 -은 슈퍼파워의 통치가 초래한 정치의 심대한 변신을 의미한다.

"시민말고, 기업가가 되어라."

이제 정치는 법인 자본주의의 체계와 문화를 복제하기에 이른다. 즉 정치는 합리화되고, 자본화되며, 관리(경영)되고, 엘리트 지배적인 것·극단적으로 경쟁적인 것·테크놀로지 의존적인 것이 된다. 관심·불만·제안의 표명을 장려하는 표현적 정치 대신, 이제 우리는 반대를 관용하기는 하나 아래로부터의 제안이나 저항에는 일체 반응하지 않는, 통제된 정치를 목도하고 있다.

이 새로운 정치는 기존의 시민-참여자 대신 관망자-소비자의 비위를 맞춘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국내 정책에 대해 최대한 관심을 줄임으로써, 즉 국내 정책 이슈를 테러리즘·에너지 공급·세계화라는 경제적·군사적 이슈들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민주주의를 심각한 수준에서 전복하는 정치다." (본문 308쪽 중에서)

저자는 "전도된 전체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사영화(국내에서 '민영화'라고도 표현되는 것)'가 주요하게 작용한다고도 주장한다. 공교육과 군사활동 등의 정부업무가 사적 기업체의 업무로 전가되거나 그들과의 공동 작업이 되는 것은 "그저 공급자의 변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도 덧붙인다.

셸던 월린은 이를 통하여 자본이 자신의 문화를 세계에 주입하면서 스스로 권력과 지배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치가 경제권력과 유착하면서 '관리되는 민주주의'로 체제가 변질되었다는 비판이다.

민주주의 재활성화를 위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

결론 부분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재활성화를 거론한다. 하지만 단순히 지금까지의 변화를 모두 무시한 채 '새롭게 시작하자'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도 강조한다. 민주주의의 문화적 기반을 왜곡하고 정치적 실천을 조금씩 파괴한 지난 반세기의 변화를 성찰하는 일이 첫 번째 과제라는 것이다.

또한 테러리스트의 공포에 쉽게 흔들리는 대중은 합리적 양심으로 기능할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화된 담론이 주도하는 정치로 불평등을 양산하는 역동적 경제와 결합해 '강력한 국가'와 동시에 '실패한 민주주의'를 낳는다고 분석한다. 이에 대해 거짓말에 선동되지 말고, 지속해서 참여하는 시민의식을 지역에 뿌리내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저자의 주장은 비록 원론적이지만,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지난 5년 동안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도 많이 변화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미국 민주주의가 걸어온 길과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정부의 많은 기능과 국가시설이 민영화되었고, 그 결과로 기업은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정부는 국민의 삶보다 수치로 환산가능한 경제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설정했다.

정책에 대한 반대여론이 들끓으면 북한과 관련된 안보이슈를 내세웠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정부는 모든 정책의 정당성을 얻었다. 줄어드는 국민의 권리나 목소리와는 달리 국민을 상대로 한 공권력은 지나치게 강화되었고, 집회를 무자비하게 해산하거나 민간인 불법사찰·인터넷 여론조작을 일삼는 모습까지 드러났다. SNS에서의 정부 비판은 손쉽게 국민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어느샌가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

지난 정부의 과오가 제대로 처벌되거나 아직까지도 말끔하게 씻겨지지 않은 오늘날,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물음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고. 정부는 '한국은 선진국'이라고 스스로 자랑하지만, 자부심에 앞서 돌아보면 성찰하는 시간이 절실하지 않은가 되묻고 싶다.

이 책은 선거기간에만 반짝이는 관심을 드러내며 '투표만을 유일한 권리로 알고 있는 대중'으로 전락한 국민에 대해 쓴소리도 한다. 저자가 '민주주의 재활성화'를 위한 대안으로 내놓은 방안은 비록 상당히 이상주의적인 면이 있으나 이러한 자성의 계기를 2013년의 한국에 던져준 것은 분명 고마운 일이라고 하겠다. 남은 과제인 실천은 우리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셸던 월린 씀 | 우석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09. | 2만3000원)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

셸던 월린 지음, 우석영 옮김, 후마니타스(2013)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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