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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글자 창제 이유에 대해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편안하게 할 따름"이라고 밝혔다. 2013년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0.2%이다. 이제 글을 몰라서 자기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턴가 '진학'과 '출세'의 필요조건으로 자리 잡은 언어가 있다. 바로 '영어'다. 부모가 그랬듯이 자식들도 혀를 굴려 '엘(L)'과 '알(R)'을 정확히 발음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 돈을 쏟아 부으면서 말이다. 어떤 이들은 자녀의 영어발음을 좋게 하려고 자녀의 혀를 수술대에 올리기도 한다.

7월말 서울의 한 대학 강의실. 초등학생 15명이 앉아 있다. 주니어 영어캠프다. 8시 10분에 출석을 확인한다. 수업은 오후 4시 50분까지 계속된다. 오전에는 '패스트푸드' 등 하나의 주제를 두고 영어로 이야기한다. 오후엔 산책을 하고, 영어뮤지컬을 배우고 부른다. 2주 간 참가하는 데 드는 수강료는 접수비와 활동비 등을 포함해 70만 원이다. 하루 7시간 씩 10일 간 수업을 들으니 하루 수강료가 7만 원인 셈이다. 규칙은 영어로만 말하기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영어로 대화한다.

이렇게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방학 동안 영어캠프를 운영하는 대학이 많다. 고려대학교는 '기숙형 영어캠프'를 연다. 3주 간 '원어민 강사+명문대 멘토+특목고 멘토'에게 수업을 받으려면 298만 원을 내야 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기숙 영어캠프를 열어 1주 과정(89만 원), 2주 과정(184만 원), 3주 과정(294만 원)을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도 300만 원 남짓 하는 캠프를 운영한다. 사설학원과 똑같다. 일부 학부모들은 "외국에 나가는 것보다 저렴하고 가까이에 있어 안심이 된다"며 긍정적이다. 이 캠프에 참여하는 학생에겐 원어민 강사와 대화를 나누고, 명문대에 다니는 선배를 만날 기회가 늘어날 터이다. 입시 과정에선 유명 대학 캠프에 참가했다는 경력을 더할 수 있으니, 진학 경쟁에서도 한 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의 영어 실력을 좌우할 것이란 생각이다.

일산에 사는 주부 김희경(40)씨는 "국·영·수 과목을 비롯해 태권도, 피아노 등을 가르치려면 한 아이에게 월 80만 원에서 100만 원이 든다"고 말했다. 지난해 통계청이 새로 발표한 우리나라 지니계수는 0.357로 경제개발계획기구(OECD) 34개국 중 29위,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지니계수는 소득 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로, 1에 가까울수록 빈부 격차가 심하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인종이나 성별·사회적, 신분·재산 유무와 관계없이 균등하게 교육 받을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한다. 단지 차별대우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의 기회를 실질적으로 고르게 받도록 국가가 적극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의 소득에 따라 자녀가 받을 수 있는 교육 혜택이 크게 달라진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교육이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다. 10~13살은 밖에서 한창 뛰어놀 성장기다. 그들은 방학을 맞이했지만, 영어캠프에 와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막힌 교실에서 답답한 영어로 기계적인 회화를 이어간다. 이들의 머릿속엔 그동안 배웠던 영어 단어와 숙어만 맴돌 뿐이다. 부지런함과 성실성을 기특하다고 칭찬해야 할까?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오롯이 아이들의 선택이었냐는 것이다. 명문 대학에 보내고 싶은 부모의 욕심일 가능성이 더 크다.

초등학생에게 방학 때만이라도 맨발로 숲을 거닐고, 별을 보며, 춤추는 나비를 쫓을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 아일랜드 같은 나라에선 '전환학년'을 시행하고 있다. 중3을 마친 학생에게 시험 없이 실습이나 직업을 체험할 1년의 시간을 준다. 아무런 꿈도 없이 방황하는 걸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생에게도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자유롭게 설계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니 /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 쉰 예순에도 그러지 못하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노래처럼 '무지개'를 보고 설렌 유년을 보낸 사람이라면, 어른이 돼서도 아름다운 시절을 그리워할 수 있어야 한다. 영어캠프에서 유년기를 보낸 우리 아이들은 유년기의 '무지개'를 어떻게 기억할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조아라씨는 현재 인권연대 청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어캠프#대학캠프#전환학년#과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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