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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6일 기자가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 식욕억제제인 '푸링정'은 4주 이내 처방이 원칙이지만 26일 하루 동안 두 곳의 병원에서 총 88일 분을 처방받았다.
23~26일 기자가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 식욕억제제인 '푸링정'은 4주 이내 처방이 원칙이지만 26일 하루 동안 두 곳의 병원에서 총 88일 분을 처방받았다. ⓒ 김지혜

"원하는 만큼, 원하는 것으로 드릴 게요."

'무한리필 식당' 종업원의 말이 아니다. 서울의 한 피부과에서 식욕억제제 구입 상담을 하며 들은 말이다.

고도비만 환자에 한해 제한적으로 처방해야 하는 식욕억제제가 무분별하게 판매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욕억제제는 원칙적으로 식이요법이나 운동요법으로도 살을 빼기 힘든 비만 환자에게 단기간 사용되는 치료약이다.

하지만 23~26일 찾아 간 서울 7곳 병원 모두 저체중인 사람도 쉽게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을 수 있었다. 여러 병원에서 중복해 처방받는 것도 가능했고, 3개월분을 한 번에 처방받을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는 식욕억제제 처방에 대해 "체질량지수(BMI) 30kg/㎡ 이상의 고도비만인 사람은 의사와 상담 후 4주 이내 분을 처방받는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병용을 금지하고, 과량 복용시 불안, 사지떨림, 환각상태, 폐동맥 등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치명적인 중독 시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체질량지수는 키와 몸무게를 이용하여 지방의 양을 추정하는 비만 측정법으로 몸무게를 키의 제곱으로 나눈 값이다. 예를 들어 키가 160cm인 사람이 고도비만이 되려면 몸무게가 80kg에 달해야 한다.

의사 얼굴도 못 봤는데 식욕억제제 처방하는 곳도 있어

기자가 식욕억제제를 처방받기 위해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A피부과에 전화했다. 간호사는 원하는 약의 종류와 처방기간 그리고 주민번호를 물었다. 간호사는 이어 대답했다.

"푸링정(식욕억제제의 한 종류)으로 2개월 분 처방전 준비해 놓을 게요. 찾으러 오세요."

이 병원에서 기자는 의사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처방전을 받을 수 있었다. 체중이나 키, 평소 앓고 있는 질병 등 기본적인 정보도 묻지 않았다.

 서울 한 병원의 식욕억제제 처방 안내문. 안내문엔 "6개월, 1년 처방이 한 번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처방비만 선납이므로 내원은 해야 합니다"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상담을 해 본 결과 내원 없이 약의 종류에 따라 3개월~1년까지 한 번에 처방이 가능했다.
서울 한 병원의 식욕억제제 처방 안내문. 안내문엔 "6개월, 1년 처방이 한 번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처방비만 선납이므로 내원은 해야 합니다"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상담을 해 본 결과 내원 없이 약의 종류에 따라 3개월~1년까지 한 번에 처방이 가능했다. ⓒ 김지혜

두 번째 찾아간 B피부과. 접수대에 'DIET 약 처방, 기간제로 등록하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4주에 3만원, 1년에 20만원' 식으로 처방을 받을 수 있었다. 간호사는 "몇 가지 약만 최대 3개월 분을 한 번에 처방(푸링정이 이에 해당)할 수 있고, 나머지는 최대 1년 치까지 처방해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간단한 키와 몸무게 검사를 거쳤다. 161cm, 45kg. 저체중이었다. 의사는 "3개월 치를 한꺼번에 줄 수 있다"며 "여러 가지 약을 복합적으로 처방하면 효과가 세진다"고 말했다. 이 병원에서 푸링정을 포함한 7개의 약, 28일 분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

병원을 나와 약국에 들어갔다. 약사에게 처방전에 적힌 약에 대해 묻자 그는 "많으면 하루에 여자들 수십명은 받아간다. 의사가 알아서 처방해준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그는 "모든 약은 부작용이 있다. 그것은 살을 빼려면 본인이 감수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이날 병원 두 곳에서 '푸링정'을 중복처방 받아 총 88일 분의 약을 살 수 있었다. B피부과에서 최대한 줄 수 있는 양(3개월)을 받았을 경우 150여 일 분까지도 처방이 가능했다. 푸링정 처방의 권고량이 4주임을 감안했을 때, 5배에 이르는 양이다.

피부과와 성형외과 7곳 중에서 B피부과를 제외한 어디에서도 신체검사를 하지 않고 원하는 양의 향정신성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을 수 있었다. 기자의 체질량지수는 17.4kg/㎡로 처방 대상인 30kg/㎡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서울 한 병원 앞에 내걸려 있는 식욕억제제 홍보 광고물
서울 한 병원 앞에 내걸려 있는 식욕억제제 홍보 광고물 ⓒ 김지혜

비만 환자 위한 단기간 보조요법, 표준체중 복용 때 부작용 '위험'

대한약사회 학술자문위원인 김성철 영남대학교 임상약한대학원 교수는 "식욕억제제는 고도비만인 사람에게 처방하는 것"이라며 "(고도비만인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식사를 줄이는 방법으로도 안 될 경우 보조제 성격으로 복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식욕억제제는 기본적으로 향정신성의약품, 즉 마약류이기 때문에 강제로 잠을 못 자게 하거나 심장을 더 뛰게 하는 기능이 있다"며 "인간에겐 자신의 체중을 유지하려는 '체중순환'의 성질이 있으므로 강제로 살을 빼면 리바운드(요요현상)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식욕억제제는 주로 주석산펜디메트라진, 염산펜터민, 염산디에칠프로피온 등의 성분을 담고 있다. 이 성분들은 비만 환자를 위한 단기간 보조요법에 쓰인다. 그러나 최근 표준체중의 사람들이 식욕억제제를 먹고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ㄱ씨(27, 여) "처음 한 알을 먹고 저녁에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가 쓰러졌어요. 그때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약을 먹으면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화장실에 자주 가고, 어지럽더라고요. 대학 졸업사진 촬영을 앞두고 2주 간 '바짝' 먹었는데 7kg이 빠졌죠. 그런데 먹었다, 안 먹었다를 반복하니 요요현상이 생기고, 약에 내성도 생겼어요. 지금은 웬만한 거 먹어서는 효과가 없어요."

ㄴ씨(26, 여) "165cm, 57kg이던 몸무게가 식욕억제제를 먹고 2달 만에 51kg이 됐어요. 살은 빠지긴 했는데 가슴이 계속 두근거리고 잠이 너무 안 와서 약을 끊었어요. 그랬더니 폭식을 하게 되더라고요. 혼자 피자 한 판을 다 먹었죠. 이후 11kg이 쪘어요. 더 큰 문제는 약을 그만 먹게 되니 빈혈이 심해져 철분제 복용은 물론이고 수혈까지 받았어요. 생리도 갑자기 안 하게 됐고요."

법적 강제 없어 '의약품 중복처방' 못 막아

이러한 위험성에도 식욕억제제가 무분별하게 처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식약처 관계자는 "의약품 중복처방을 막기 위한 'DUR(의약품안심서비스)' 프로그램이 있지만 이를 강제할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병원에서 DUR을 사용하고 있다지만 의무는 아니다"며 "의사가 DUR을 꺼놔도 처방은 의사의 고유 권한이라 일일이 제재하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DUR은 환자가 여러 병원에서 같은 약을 처방받지 못하도록 2010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만든 시스템이다.

또 식욕억제제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의약품이기 때문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아래 심평원)의 심의도 받지 않는다. 심평원 관계자는 "식욕억제제는 비급여 의약품이라 심평원에 보고되지 않는다"며 "비급여 의약품은 건강보험의 영역에서 제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식욕억제제#다이어트#푸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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