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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 네팔, 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 저녁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항상 라디오로 <싱글벙글쇼>를 들으며 청소를 하던 엄마를 닮았는지, 나는 라디오를 좋아했다.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뜬눈으로 라디오를 듣던 매일밤은 유희열, 이적, 조원선, 델리스파이스, 이석원 등의 뮤지션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졌고 급기야는 어느 날 저녁,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스치는 데까지 이르렀다.

'뮤지션이 되자!'

뮤지션이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10년 후의 나를 생각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러한 꿍꿍이를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입을 다물고 음흉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행동을 개시해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한 일은 인터넷에서 음악 과외를 찾는 거였다. 일단은 음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니.

인터넷에는 나처럼 음대에 가겠다고 다짐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모두들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요?' '음대에 가면 돈이 많이 든다고 하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요.' 그냥 속으로 꿈꾸고 있을 때는 좋았는데, 막상 실전에 옮기려고 하니 쌓여가는 걱정거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의 상상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가고 근심은 나무뿌리처럼 구석구석 깊은 곳까지 잠식했다. 누추한 우리집에 과외 선생님이 와서 흉을 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내가 선택한 건...

끙끙 앓던 나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했다. 나는 뮤지션이 되지 않았고 악기도 배우지 않았다.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음대에 가야만, 뮤지션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아마,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하며 살고 싶었다기보다는, 뮤지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가는 것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첫째는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음악만 하면 그만인 거고, 둘째는 음악을 하건 안 하건 과정은 전혀 중요치 않고, 뮤지션이 되는 그 목표 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차이였다. 목적만 있었던 나는 그 길고 험난한 과정이 두려웠고, 뮤지션이 되지 못할 거라는 걱정에 깔리고 짖눌렸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허상이었다. 이후에도 난 변함이 없었다. 마구 흘러가다 가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에 결심을 하고, 다시 흐지부지되고, 별로 이룬 적은 없이 그렇게. 난 성취욕이 부족해 뭐 하나 오래 붙잡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재수 없게 88만 원 세대로 태어난 탓에 대학 졸업 이후 계약직으로 직장 3군데를 전전하다 28살이 됐다. 고등학교 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27살인데 뮤지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고민을 올린 사람보다 1살이 더 많았다. 어쩌다 보니 나는 이제 꿈도 없고, 이렇다할 경력도 없는 '흐지부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미국 작은 도시 파고에서 만난 더스틴

 떠나고 싶다는데 구질구질한 이유같은 걸 주렁주렁 달고 떠날 필요는 없다. '응당 그래야 했기에 떠났어요'라는 대답을 누군가에게 물을 것도 아니고 들려 줄 필요도 없다.
떠나고 싶다는데 구질구질한 이유같은 걸 주렁주렁 달고 떠날 필요는 없다. '응당 그래야 했기에 떠났어요'라는 대답을 누군가에게 물을 것도 아니고 들려 줄 필요도 없다. ⓒ sxc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미국의 작은 도시 파고에서 만난 더스틴은 나와 달랐다. 영화학과 학생이었던 더스틴은 고등학교 때 영화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순간에 대해 장황히 늘어놓았다. 나도 고등학교 때 그런 결심을 했었는데. 이 친구는 여기까지 끌고 왔구나…. 시샘이났다.

"만약에 말야, 영화 감독이 안 되면 뭐가 되고 싶어?"
"아무것도."

나 같이 잔머리 굴리는 놈이 아니었다. 뮤지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뒤로 내 머릿속에 가득 찬 것들은 만약 실패했을 때의 뒷감당이었는데. 결국 그 무게가 더 커져버렸고 생각도 쉽게 접게 되어버린 건데.

영화 감독이 되겠다고 하던 더스틴은 아직 내가 파고에 머물러 있을 때 LA로 이사를 갔다. 마침 엄마가 거기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영화계에 아는 사람이야 아무도 없지만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48시간 동안 그레이 하운드 버스를 타고 LA에 있는 더스틴을 보러갔다. 6개월 후, 더스틴은 영화 감독도 좋지만 삶의 경험이 더 중요한 것이라며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4년 후 나와 결혼했다.

문득, 걱정만 하는 내 자신이 지긋지긋해졌다

어렸을 때, 인생은 간단명료했다. 무거운 돌을 하나씩 쌓아 내가 바라는 그곳까지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하나, 대학교 하나, 취업 하나. 하지만 28살이 되어버린 나는 무겁지 않았다. 계단 어느 곳에도 올라와 있지 않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더스틴은 여행을 가자고 했다.

"여행? 나도 가고 싶어."
"그럼 가자."
"회사 계약은 끝내고 가야하지 않을까? 마무리 해야 하는 프로젝트도 있고…."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자, 언제나 그랬듯 습관처럼 그 뒷감당에 대한 걱정거리가 내 머릿속을 간질였다. 그렇게 싫어하던 회사에도 갑자기 애착이 갔다. 나이가 들고 마음이 약해진 엄마도 걱정이었다. 여행을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내 자신이 지긋지긋해졌다. 여행을 간다고 뭐가 달라져야 하는 건 아니다. 달콤한 열매와 결실을 따기 위해 여행을 가는 건 아니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가면 그만이다. 잡소리와 변명은 이제 그만!

떠나고 싶다는데 구질구질한 이유같은 걸 주렁주렁 달고 떠날 필요는 없다. '응당 그래야 했기에 떠났어요'라는 대답을 누군가에게 물을 것도 아니고 들려줄 필요도 없다. 나는 더 이상 뮤지션이 되기 위해 음대를 준비하는 짓 같은 건 하기 싫었다.

뮤지션이 되고 싶으면 음악을 시작하면 된다. 무엇을 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단지,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 떠나기로 했다. 이렇게 결심을 하자 떠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볍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두 존재. 축적하고 이뤄놓은 게 없는 우리를 붙잡는 짐은 없었다. 언젠가는 떠나고 싶었던 이 여행 때문에 가볍게 살아온 것일 수도 있다. 가진 게 많아 무거우면, 버리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세계여행#인도#여행#배낭여행#부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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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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