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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아빠와 같이 있으면 은근히 긴장

"그러니까 이렇게 작은 것들이 모이면 큰 금액이 될 거고, 그렇게 되면 결국 소비자들이 손해를 보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속히 시정을 해야 합니다."

아빠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쯤 높아져 있었다. 그렇게 10여 분을 통화한 후에야 아빠는 전화기를 내려놓았고, 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보았다.

"내가 지난 주 동안 전화 통화요금 내역을 실시간으로 검색해 봤는데 아, 글쎄 내 전화기에 찍힌 통화시간이랑 인터넷으로 확인한 시간이랑 계속 차이가 나는 거야. 인터넷으로 실시간 요금을 확인하는 프로그램이 있거든. 그 차이가 불과 몇 초이지만 그게 한 달이 되면 몇십 원으로 차이가 나고, 또 나만 사용하는 게 아니잖아. 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렇다면 그 금액이 얼마나 크겠어. 그래서 시정해 달라고 한 거야."
"..."

"회사에서도 인정을 했어. 오히려 고맙다고 하더라고, 자기들도 이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예견을 했지만 이렇게 직접 소비자한테 이의 제기가 들어온 건 처음이라나, 정식 안건으로 올려 회의를 열겠다는 걸."

아빠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베어 있었다.

"그럼 아빠가 일주일 동안 매일 체크하신 거예요?"
"물론이지. 회사에서 실시간 요금확인제를 해놓았으니 얼마나 정확한지 봐야지. 그리고 나도 어느 정도 데이터가 있어야 말을 할 수 있지."

"역시 아빠는 계산돌이야. 나는 그렇게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으음, 아니, 그건 소비자가 해야 할 일이야. 당연히 내가 쓴 만큼 돈을 지불해야지. 왜 쓰지도 않은 비용을 지불하냐고."

내 말에 아빠는 소비자의 권리에 대해 한 차례 연설을 시작했다.

'계산돌이', 아빠에게 붙은 별명이다. 언제, 어디서나 정확해야 한다는 아빠는 별명 만큼이나 매사 빈틈이 없는 것은 물로 남들은 생각하지도 않는 일에 목숨을 건다. 그 뿐인가? 산수는 물론, 말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도, 물건을 구입할 때도, 행동을 할 때도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자신이 말을 할 때는 경청을 해야 하고, 묻는 말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설명하듯 대답을 해야 하고, 물건을 구입할 때도 계획을 세워서 가격비교를 해보고...

가끔 당신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기대에 못 미칠 때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그 자리에서 풀어야 한다. 그 뿐인가?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당신 입고 있는 자켓이나 바지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도 왼쪽, 오른쪽, 안쪽까지 구별해서. 좋게 말하면, 아니 좋게 말할 것도 없이 그냥 '괴짜' 계산돌이다.

덕분에 우리 식구들은 아빠와 함께 있으면 은근히 긴장하곤 한다. 가끔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에도 의미를 부여해서 당황하게 하고, 때로는 대답을 하면 말대답 한다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무시한다고 단정 지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고, 한번쯤 느닷없이 화를 내면 점점 커져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그렇다고 내가 아빠를 멀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빠는 누가 뭐래도 딸바보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둘... 아빠, 조금만 참아주세요

"그냥 작은 빵집이라도 하면 좋겠어. 정년도 없고 떼돈을 벌지 않아도 좋으니."

씁쓸한 표정을 짓는 아빠를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동안 툭하면 시골로 내려가자던 말과는 달리 아빠의 진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들어 부쩍 힘들어 하는 아빠를 보면 자꾸 미안해진다. 이렇게 힘들 때 아빠에게 오히려 짐을 더해준 것 같다. 우리만 힘든 게 아니라고, 곧 좋아질 거라고 다짐을 해보기도 하지만 아빠의 늘어진 뒷모습을 보면 불안해지기까지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과 나, 모두 대학생이다 보니 등록금에 책값, 교통비, 용돈까지 뒷바라지 하느라 등과 허리가 휠 지경이고, 회사 분위기도 하루가 다르게 뒤숭숭해지고, 아래에서는 치고 올라오고 더 이상 오를 데는 없고, 그나마 엄마가 하던 일도 이제는 접은 상태라 모든 경제 부담을 아빠가 책임져야 하니.

그러다보니 정작 자신을 위해 쓸 여유가 없어 언젠가부터 아빠 모습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진다. 사계절 내내 한 켤레의 구두로, 그것도 낡아서 비라도 오는 날이면 양말이 젖어 수선 집에서 창을 갈아 신고, 남방도 목 부분이 닳아헤져서 세탁소에서 바꿔 달아 입고, 소매는 수선조차 할 수 없어 접어서 입고, 청바지는 헤진 부분을 짜깁기 해서 입고.

"내 성격도 참... 한 번 마음에 드는 옷만 죽어라고 입으니..."

우리들 앞에서는 차마 사실대로 말 할 수 없어 여유가 없는 게 아니라 당신 성격 탓으로 돌리고.

아빠가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걸었으면 좋겠다. 아빠에게는 미래의 약사, 외교 분야에서 일할 우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엄마도. 우리 모두 아빠를 사랑한다는 것도, 지금은 비록 아빠의 어깨가 무겁다 해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그 짐을 모두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아빠도 딸 잘 두었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빨리 오길 바라며.

덧붙이는 글 | 나의 아버지 응모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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