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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깔스러운 추억을 시적인 표현으로 버무려놓은 여행에세이

사람에게 있어 추억이란 제각각의 경험들 중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았을 때 빛나는 어느 부분들일 것이다. 추억의 종류야 개인과 그 상황의 수만큼 셀 수 없이 많겠지만, 공통적인 범주를 크게 보자면 세가지 정도로 추려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와 함께한 순간, 맛있는 음식을 먹은 기억, 새로운 어느 공간으로 발을 내딛는 걸음.

 변종모의 여행에세이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의 표지.
변종모의 여행에세이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의 표지. ⓒ 허밍버드

변종모의 여행에세이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는 그 세가지를 적절하게 조합하여 만든 맛있는 한 그릇의 요리와도 같은 느낌이다. 한 때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였던 그는 이집트와 파키스탄에서부터 라오스·미국·인도·스리랑카·아르헨티나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겪은 여행담을 320페이지의 종이 위로 매끄럽게 풀어놓았다.

배낭 하나를 메고서 떠나온 곳, 아는 사람조차 하나 없는 낯선 이국의 땅. 후에 돌이켜보았을 때 그곳이 그리워질 이유라면 그 곳에서 만난 사람, 혹은 한끼를 맛있게 해결해준 음식이거나 아름다운 풍경이리라. 여행자라면 누구나 외로운 법이고, 그런 그들에겐 누군가 혹은 작은 무언가와 함께할 수 있음에도 작은 발자국에 정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삭막해보이는 보도블럭이 깔린 풍경에서도 그 틈에서 피어난 풀과 꽃을 발견하고 웃음짓게 되듯이.

"자꾸만 길을 나서게 된 건 낯선 당신들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당신들은 끝내 그 좁은 옆자리를 나에게 내어주었다. 밥은 먹었느냐는 당신들의 따뜻한 말에 나는 비로소 두고 온 곳의 소중한 사람들을 뜨겁게 떠올렸다. 나의 공허가 무엇인지 나의 빈 곳이 어디인지,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들이 알게 해주었다. 그래서 다행이었고 그래서 문제였다." (본문 중에서)

책을 읽다보면 곳곳에 첨부된 멋진 풍경의 사진에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저자의 시적인 표현에 또 한번 놀라고, 그 글솜씨로 맛깔나게 쓰여진 글을 읽다보면 금새 군침이 꼴깍 넘어간다. 표지의 추천사에서 소설가 임수현씨가 쓴 표현처럼, 이 책은 저자 변종모씨가 '기억으로 차린 식탁' 같다. 여행을 통해 만난 잊지 못할 사람들과 그곳에서 맛 본 음식들, 그런 다시없을 추억만큼 달콤한 것이 어디 또 있을까.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읽고 나면 흐뭇하게 배부른 느낌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의 한 구절. 사인회에서 저자 변종모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책갈피 삼으라는 듯 한장씩 넣어주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의 한 구절. 사인회에서 저자 변종모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책갈피 삼으라는 듯 한장씩 넣어주었다. ⓒ 허밍버드

이 책은 '여행에세이'를 표방하고 있지만, 특정 국가나 도시의 세부적인 정보를 나열해놓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그 도시에서 만난 특별한 인연들, 그리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가 담겨있다. 매번의 사연들에는 월남쌈·짜이·와인·토마토를 곁들인 조갯국·물김치처럼 여행 당시에 굶주린 배를 채워준 음식에 대한 글도 실감나게 녹아들어 있다.

그렇다. 우리는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만, 그 일탈에서도 늘 우리는 무언가를 먹으며 삶을 이어가야 한다. 그러고보면 추억이라는 것은, 우리 생각보다 사소하면서도 가까운 언저리에서 모락모락 김을 풍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자꾸 당신에게 밥을 덜어주고 싶던 마음. 그 마음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다면 내 그릇은 영원히 반이어도 좋으리." (본문 중에서)

책에 담긴 감정들은 여행을 떠난 사람으로서 겪은 외로움과 허전함이다. 또한 여행 도중에 만난 인연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리움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쉽게 채워질 수 없는 갈증, 허기진 뱃속처럼 공허한 느낌이다. 많은 날들을 여행하며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따스한 온기와 그들과 마주앉아 먹은 요리는 비어있던 부분을 채워주었으니, 어찌 아련한 추억으로 남지 않겠는가.

"문득 저 먼 곳이 그리워지는 날, 이곳에서 열심히 키웠던 따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나는 또 한동안 떠나겠지만, 우리는 지구상 어디에서라도 스칠 인연들. 잠시 나 같은 그대를 생각한다. 그대여, 허기진 마음이 어느 날 문득 누군가에게 든든한 한 끼 식사보다 나은 위로가 될 수 있으리. 그래서 그대도 오래오래 누군가에게 든든한 위로가." (본문 중에서)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는 지난날 내가 훌쩍 떠났던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의 문장들은, 담백한 인사 한마디로 미소짓고 소박한 밥 한끼에 배부를 수 있었던 추억을 다시 불러온다. 그래서 책장을 덮고나면 흐뭇한 마음에 배가 부를 때처럼 든든해진다.

그런 이유로 든든한 위로가 필요한 방황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어설프게 다독이려고 하기보다 말없이 이 여행에세이 한 권을 건네어주고 싶다. "비록 지금 지독한 허전함에 아파할지언정,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덧붙이는 글 |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어느 여행자의 기억)> 변종모 씀, 허밍버드 펴냄, 2013.03, 1만3800원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 어느 여행자의 기억

변종모 글.사진, 허밍버드(2013)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변종모#여행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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