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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러운 전쟁> 겉표지
<더러운 전쟁> 겉표지 ⓒ 이후
책의 묘미는 역시 독서 후 찾아오는 무한한 상상력을 동반한 사유 활동이다. 이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책이 있다. 바로 안나 폴릿콥스카야의 <더러운 전쟁>이다. 혹자는 이 책을 읽고 목숨을 걸더라도 진실을 밝혀내는 '기자정신'을 느꼈다고 한다. 다른 이는 사회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에 화가 난다고도 했다. 내게는 역시 전쟁은 황폐화와 비참함만을 가져온다는,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가슴속에 아로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어디선가 그랬다. 전쟁이 발생하면 차라리 입대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결국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군부와 관료, 정치가들이고 그 결과물을 오롯이 받아 견뎌내야 하는 것은 양민들이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돌아가버리는, 철저하게 본능이 지배하는 전장의 상흔은 엉뚱하게도 평범한 양민들이 떠안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저녁상을 앞에 두고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웠던 가족이 다음 날 아이를 잃은 초상집으로 돌변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체첸 분쟁과 러시아 안보 정책에 대해 많은 기사를 쓴 안나 폴릿콥스카야 기자는 책 <더러운 전쟁>을 통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증언을 우리에게 전한다. 이 책은 안나가 제2차 체첸 전쟁 기간 동안 전쟁터와 수용소들에서 보고 들은 참상을 기록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엄마의 잘린 다리를 쉬지 않고 긁어대는 여섯 살 난 딸, 조각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며 울부짖는 소녀, 딸과 이웃집 소녀를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비행기 총격을 막고 죽어간 어머니, 부인과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넋이 나가 수용소를 맴도는 아버지, 학살당한 이웃의 시신을 50구 넘게 수습했지만 제대로 매장해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 미래에 대한 어떤 꿈도 꾸지 못한 채 절망하는 젊은이들. 이들 모두 자신이 전쟁 후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했을까?

평화로운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인권과 자유는 마치 공기나 햇빛과 같다. 너무 자연스러워 그 가치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잃어버리면 그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전쟁이나 독재 상황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인권은 너무나도 간절히 갖고 싶은 실체가 된다. 우리의 역사도 그랬지 않은가. 모호하고 상징적이었던 개념들이 간절함과 만나면 명확하고 분명한 개체가 된다.

전쟁 상황에서 평소 우리가 가지는 '상식'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본능과 야만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정글에서의 그것과 같이, 총을 가진 자의 지배가 있다.

평화로운 사람들 수천 명의 삶은 모스크바나 모즈도크에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의 의지보다는 현장에서 명령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지적·도덕적 수준에 따라서 좌우된다. 군인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서 마음 가는 대로 사람들에게 총을 쏜다. 살고 죽는 것은 군인들의 자의에 맡겨진다. (중략) 전쟁에서 전투원들은 명확히 둘로 나뉜다. 잠재적 희생자들은 '좋은' 쪽을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책 본문 중)

전쟁터와 수용소에서 만난 체첸 전쟁의 '참상'

체첸 분쟁
구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민족주의가 대두하였을 때 체첸 민족파의 두다에프 장군은 특히 1991년 8월 쿠데타 사건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러시아에서의 독립을 주장하여 옐친 정권에 대립한다. 당시는 타타르스탄 공화국 등도 러시아와의 연방조약을 거부하였지만 체첸은 1993년의 러시아 헌법 채택 후에도 계속 저항하여 1994년말 옐친은 군을 파견, 무력분쟁으로 발전하였다. 게다가 러시아군이 패배하여 수도 그로즈니 등은 폐허가 되었다.

이것은 모스크바와 체첸의 대립에 이어 내부에서의 씨족대립, 석유·무기 등의 이권을 둘러싼 복잡한 분쟁이었다. 1996년 4월 21일 두다예프가 암살된다. 1996년에 안전보장 담당서기였던 레베지가 주권문제를 보류하는 형태로 정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후에도 마스하드프 대통령 등 기타의 지도자와 내부의 대립이 치열하고 테러사건 등도 속출하고 있다. 1999년 여름 이슬람 무장세력의 다게스탄 침공으로 푸틴 정권 등과 제2차 체첸 전쟁이 있었다.(<21세기 정치학 대사전> 인용)
이런 현상은 전투현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지속되는 한, 굳이 총알과 폭탄이 날아다니지 않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쟁 중이라는 상황만으로 인간의 잠재된 야만성을 극한으로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군대 지휘관은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민간인은 손에 흰 수건을 들고서 11시와 13시 사이에만 지하실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군인들은 수건을 들고 있지 않거나 허용된 시간 외에 밖으로 나오는 사람에게는 발포를 해야 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마을은 '해방'되지 않았나? 예를 들어 저녁부터 새벽까지만 통금을 하는 것은 왜 안 되는가?

답변은 간단하다.

"그냥"

딱 한마디다. 다른 것은 없다. 캅카스 지역의 작전 책임자이자 러시아의 새로운 영웅인 샤마노프 장군은 부하들에게 그렇게 답변하라고 지시했다. 바로 그가 '11시부터 13시까지'를 발명한 사람이다. 이것이 20세기 말 군대가 가진 생각의 정점이다.(책 본문 중)

안나는 참상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양민들을 고통으로 내몬 정치인과 관료층의 탐욕과 부패를 고발했다. 소수에 의해 국가 전체가 어떻게 무책임하고 뻔뻔한 집단으로 변모해갔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이 폐해를 보듬어 안고 치유하기 위해 애썼다.

한편으로 조국이 국민과 인간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떳떳한 국가가 되기를 갈구한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녀는 날로 뻔뻔하고 가혹해지는 러시아 정부의 언론 통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책임자들을 규탄했다. 숱한 위협과 협박을 받았지만, 고발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던 중 2006년 10월 7일,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총 네 발의 총알을 맞은 모습으로 숨진 채 발견된다.

뒷감당은 하지도 않을 것이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교묘히 전쟁을 유도하고 위험을 고조시키는 세력과, 전쟁으로 인해 국민들이 겪을 고초와 비극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은 안 된다는 세력, 둘 중 누가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는가?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신의 비겁함을 정치적 이유를 들어 합리화 시키지 말라.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고 공감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다. 우리는 허울 좋은 껍데기 이전에 결국 '인간'임을 절대 잊지 말자.

덧붙이는 글 | * <더러운 전쟁> 안나 폴릿콥스카야 씀, 주형일 옮김, 이후 펴냄, 2013년 2월, 1만4400원
* 이 기사는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전쟁 - 안나 폴릿콥스카야, 희망이 살해된 땅 체첸에 서다

안나 폴릿콥스카야 지음, 주형일 옮김, 이후(2013)


#더러운 전쟁#이후#안나 폴릿콥스카야#주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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