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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뎅이>(1953)

너의 앞에서는 우둔(愚鈍)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았다
백년(百年)이나 천년(千年)이 결코 긴 세월(歲月)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사랑의 테두리 속에 끼여있기 때문이 아니리라
추(醜)한 나의 발밑에서 풍뎅이처럼 너는 하늘을 보고 운다
그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
네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추악(醜惡)하고 우둔(愚鈍)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도 우둔(愚鈍)한 얼굴을 만들 줄 안다
너의 이름과 너와 나와의 관계(關係)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소금같은 이 세계(世界)가 존속(存續)할 것이며
의심(疑心)할 것인데
등 등판 광택(光澤) 거대(巨大)한 여울
미끄러져가는 나의 의지(意志)
나의 의지(意志)보다 더 빠른 너의 노래
너의 노래보다 더한층 신축성(伸縮性)이 있는
너의 사랑

지난날, 시골 아이들에게는 딱히 장난감이란 게 없었습니다. 대신 산과 들에는 아이들이 놀이 상대로 삼을 만한 자연의 친구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지요. 그중 풍뎅이는 아이들에게 가장 만만한 놀이 상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놀이가 참 잔인했습니다. 아이들은 먼저 풍뎅이의 다리 중동을 분지릅니다.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지요. 날개 있는 곤충이 날개만 있으면 날아오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풍뎅이는 다리가 온전하지 못하면 절대 날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풍뎅이를 바닥에 거꾸로 뒤집어 놓습니다. 딱딱한 등판이 땅에 닿게 말이지요. 그러면 풍뎅이는 그 처참한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자연의 본능에 따라 힘차게 날갯짓을 시작합니다. 이때 잔인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은 손바닥으로 풍뎅이 주변의 땅바닥을 손으로 치면서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풍뎅아 풍뎅아 마당을 쓸어라. 마당을 쓸어야 손님이 온단다."

풍뎅이의 그 처참한 날갯짓은 땅바닥에 있는 잔흙과 잘디잔 검불을 날립니다. 그러면 어느새 땅바닥이 전복된 풍뎅이의 날갯짓으로 깨끗해집니다. 정말 어떤 손님이 와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요. 그런 풍뎅이의 날갯짓은 스스로 지쳐 죽어갈 때까지 그칠 줄 모릅니다.

이 시에는 화자 '나'와 시적 대상인 '너'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아마도 사랑의 관계로 맺어져 있는 듯합니다. '나'는 '너'의 앞에서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1행)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테두리 속에 끼어 있"(3행)는 '나'는 "백년이나 천년이 결코 긴 세월이 아니라"(2행)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너'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너'가 '풍뎅이'에 빗대어져 있습니다. '너'는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5행) 웁니다. '너'는 슬픈 노래를 부르듯 날갯짓을 하며 웁니다. 그때 '나'는 그 노래의 정체를 '너'보다 더 잘 압니다. 자유를 잃어 날지 못하는 '너'의 비참을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둘은 서로가 서로를 잘 공감합니다. 서로의 앞에서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압니다. 상대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대체 수영에게 이 '너'는 누구일까요. '나'와 '너'가 사랑의 관계로 맺어져 있으니, '너'는 곧 수영의 아내 김현경이 아닐는지요. 아무리 전쟁 중이었다지만, 벗과 동거하는 아내에 대한 애증을 수영은 숨길 수 없었을 테지요. 사랑하는 아내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수영은 그 사랑을 잃지 못하는 것이지요. "네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 /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6·7행)고 공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말입니다. 그는 아내가 비록 벗과 동거를 하고 있지만, 자신을 향한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너'는 이 시기 수영이 관계를 유지하던 또다른 사랑의 대상인 '미스 노'일 수도 있습니다. 미스 노는 수영이 전쟁 포로로 부산의 거제야전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된 간호사였습니다. 수영의 여동생 수명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보통 사람이 보기에 여성적인 매력이 그다지 크지 않은 이였습니다. 하지만 수영에게는 혼란한 시기를 따뜻하게 감싸준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수영에게 모성적인 존재였습니다. '나'의 '추악'과 '우둔'에 조응하여 '너' 또한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9행) 알았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너'가 그 김현경이나 미스 노가 아닌 듯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봤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땅바닥에서 마당을 쓸고 있는 '풍뎅이'의 이미지가 그런 생각에 계속 또다른 잔상을 남겼습니다. '너'를 만약 김현경이나 미스 노로 생각했다면, 수영은 왜 그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게 만들었을까요. 그는 왜 그들(김현경이나 미스 노)을 그런 고통 속으로 밀어넣은 것일까요. 아내 김현경이야 자신을 배신했으니 인간적으로 그럴 수 있다 치고, 수영에게 정신적인 안식처가 돼줬던 '미스 노'는 좀 그렇지 않은가요.

그러다가 나는 결국 '너'를 수영 자신으로 보기로 했습니다. '나 = 너 = 수영'처럼 이해하자는 것이지요. 그렇게 놓고 보니 이 시는 '사랑'에 대한 시가 아니라 '자기 성찰'에 대한 시로 뚜렷하게 다가왔습니다. 그제서야 시상이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나는 자신의 아내와 또다른 어떤 여인(미스 노)을 생각하면서 혼란스러워했을 수영을 그려보았습니다.  그 아픔을 어찌하지 못하고 스스로 허물어지는, 퀭한 눈빛의 수영을 말이지요.

'나'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반면에 '너'는 수영의 내면입니다. 이 극악한 현실을 살아가는 '나'는 '너'의 참모습을 알고 싶습니다. '너'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 고민합니다. "너의 이름과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10행) 알고 싶은 것입니다. 이 세상이 "소금 같"(11행)아서 자신을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하면 힘든 법이지요. 자기 성찰과 고민이, 그래서 더욱 필요하고 삶에서 정당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의지'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추락합니다(14행 참조). 그럴수록 '풍뎅이' 같은 "너의 노래"는 더 빨라지고 "너의 사랑"은 더한층 '신축성'을 갖게 됩니다. 사랑에 대한 아픔이 커갈수록, 그리고 아픈 사랑이 펼쳐지는 거대한 세상이 현실의 '나', 곧 수영을 압도할수록 수영은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자신의 진짜 사랑을 알고 싶어합니다.

'신축성'이라는 뜻밖의 한자어가 뜬금없이 튀어나왔을런지요. 그때 수영은 아내와의 사랑에서 처절한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전후의 극악한 현실은 그를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살이라는 단어가 수시로 떠올랐습니다. 그즈음 그는 어머니에게 욕을 퍼붓고 가재도구를 던지는 패악질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 수영에게 '신축성'은 그를 현실에 간신히 붙들어매는 실끈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요.

다리 중동이 부러뜨려진 풍뎅이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합니다. 땅바닥에 바르게 놔둬도 그저 몸부림만 칠 뿐입니다.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몸은 결코 날아오르지 못하지요. 수영은 자신에게서 그런 '풍뎅이'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뒤집힌 채로 하늘을 보며 날갯짓하는 '풍뎅이'는 또한 수영에게 생활의 처절함을 느끼게 했겠지요. <풍뎅이>를 찬찬히 곱씹어 읽다 보면, 그렇게 수영이 전후에 느꼈을 설움과 절망과 생의 비참이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수영#<풍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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