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별세계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를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953)


이 시는 한국 전쟁(1950~1953)의 포화가 멈춰진 해인 1953년에 쓰였습니다. 그 전 마지막 작품이 1949년에 나온 <아버지의 사진>이니, 수영은 4년 간 시작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공백기를 거쳐온 셈이지요. 이 공백의 원인은 당연히, 동족 간의 참혹한 싸움이었던 6.25 한국 전쟁에 있었을 겁니다.

전쟁이 터지면 생존이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됩니다. 살아남는 일, 그것은 전쟁의 야만이나 세계의 비참 등에 대한 성찰을 훌쩍 뛰어넘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곳에서 생존을 위한 욕망은 우리의 육신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동기가 됩니다. 참전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그것은 전쟁 중의 그 모든 이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자리를 차지합니다.

수영은 한국 전쟁 즈음에 서울 돈암동에서 김현경과 신접 살림을 차립니다. 1950년 4월 즈음이었지요. 면사포에 웨딩 마치가 있는 정식 결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가난했으면서도 여유가 넘쳐났지요. 그들은 자신들만의 오롯한 보금자리가 있었기에 그토록 자주 가던 명동 거리에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들은 그곳을 '싸구려 명동'으로 불렀습니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도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수영은 결혼 전까지는 노상 백수 건달처럼 보냈습니다. 일부러 일자리를 갖는 일도 많지 않았을뿐더러, 그걸 때려 치우는 일은 더욱 제멋대로였지요. 그래서 집안 생계는 그의 모친(앞의 '토끼', '아버지의 사진' 등 참조)과 바로 아래 동생인 수성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수성은 그 시절 수영과 달리 아주 지극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전쟁 중의 그 모든 사선을 뚫고 나온 수영

그런데 그런 수영에게 변화가 찾아옵니다. 아내 김현경이 임신을 했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였지요. 그는 그때 친구들의 주선으로 서울대 부설 간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시간 강사로 강단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할 당시 수영 부부는 서울을 빠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8월이 되어 조선문학가 동맹 사무실이 있던 종로 2가의 한청빌딩에서 동료 문인 몇몇(박계주, 박영준, 김용호 등)과 함께 의용군으로 강제 입대를 당합니다. 좌익이나 우익 그 어느 쪽도 아닌 그의 사상적 좌표(이는 실상 그가 동인으로 참여한 <신시론>의 위상이기도 했습니다)가 그런 '강제 입대'의 상황을 더욱 부채질 했을지도 모르지요.

수영은 그렇게 해서 평안남도 개천에 있는 야영 훈련소에서 한 달 동안 혹독하게 훈련을 받습니다. 이 시와 같은 해에 쓰인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라는 시에는, 그 훈련소의 경험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그리고 훈련을 마치고 전장에 배치되던 중 탈출하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붙잡혀 어떻게 죽음의 위기에 처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났는지 등이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는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구타를 당해 실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영은 전쟁 중의 그 모든 사선(死線)을 뚫고 나옵니다. 그뒤 수영은 인천을 거쳐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1952년에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수영은 이듬해(1953) 대구에서 미8군 수송관 통역으로 취직합니다. 부산에서는 한때 선린상고 영어 교사로 일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겨울에 서울로 올라가 주간 잡지인 <태평양> 편집부에서 근무합니다. 1953년은, 햇수로 4년을 끌어온 비극적인 전쟁이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멈춰진 해였습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허물어졌습니다. 하지만 생활은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수영은 악착같이 죽음의 사선을 뚫고 나온 것이 아니었겠는지요. 그 사이 수영에게는 네 살 짜리 아들도 생겼습니다(수영의 큰아들 준은 1950년 12월에 태어났습니다. 수영이 포로 수용소에 있을 때였지요). 그러니 미군 통역관이든 영어 선생이든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 했을 겁니다. 그제야 수영에게는 한 술의 밥이 아주 강력하게 삶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지요.

또다른 고통을 주는, 일상을 살아가는 일

평전의 저자인 김하림에 따르면, 수영은 전쟁 중의 개천 훈련소에서 정말 안간힘을 다해 열심히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이념적인 확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훈련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살아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몸부림 속에서 그는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했을런지요. 그러니 그 비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간신히 살아남은 수영에게 전쟁 후의 일상을 살아가는 일은 별것도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아는 사람 집에 손님으로 간 이 시의 화자는 '팽이'가 돌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 집 아이가 돌리는 팽이입니다. 화자는 그렇게 도는 '팽이'를 바라보는 자신을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2, 3행)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11행) 또한 '나'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구절이지요.

일상을 살아가는 일은, 전쟁터와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과는 또다른 고통을 줍니다. 일부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기도 하겠지만, 대개 전쟁에 뒤따르는 죽음의 위협은 사람이 살아남으려 하는 데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주지요. 그것 자체가 삶의 목표이자 희망의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의 삶은 어떤가요. 삶의 치열함, 예컨대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전쟁 중의 격렬한 몸짓과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지지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발버둥과 몸부림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물리적인 죽음의 위협이 상존하는 전쟁터에서와 마찬가지로, 결국 실제의 죽음이 찾아오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전쟁터 못지 않게 발버둥을 치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런 일상이 수영에게는 좋게 말해 '신기로'운 것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전쟁터가 아닌데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 왜 저 돌아가는 '팽이'처럼 정신없이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 나"(9, 10행),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 같이 보인다"(17~19행)와 같은 구절이 화자의, 나아가 수영의 팍팍한 삶을 말해주는 게 아닐런지요.

일상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는 수영

화자는, 그래서 슬픕니다. 휙휙 돌아가는 '팽이'가 "나를 울린다"(27행)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29행)님에도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32행)는 '팽이'를 보면서 서러움을 느낍니다. 그러고는 마음을 다잡습니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38~40행) 하고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요컨대 이런 말이었겠지요.

"서럽더라도 살아가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니 울어서는 안된다."

'팽이'가 계속 돌기 위해서는 채찍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채찍질을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22행)는 식으로 하면 제대로 돌지 않습니다. 대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23행) 정확하게 내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팽이'는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24행), 회전하고 있지만 정지해 있는 역설(逆說, paradox)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곧, 달은 계속 지구 주변을 돌고 있지만 돌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달나라의 장난"(25행)입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비유처럼 보이는 이 구절이 시의 제목으로 쓰이게 된 것도 이런 점 때문이었겠지요.

'팽이'가 보여주는 그 역설적인 상황은, 6.25 전후의 수영이 일상에 터를 잡으면서 경험했을 법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잘 보여줍니다. 얼빠진 채로 넋을 놓고 있다가는 쓰러질 수밖에 없는 삶, 그래서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말이지요. 그 "달나라의 장난"과도 같이 살아가는 일이 "오래 보지 못한"(25행), 곧 수영이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한 일상이었기에 그 안타까움은 더욱 커집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후 수영은 점점 현실에 차분하게 발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설움이 그를 감싸고 있었지만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주는 의미를 그는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인생과 세상을 보는 눈이 더욱 깊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가 돌아가는 '팽이'에게서 "수천 년 전의 성인"(35행)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채찍질한 보람이 있었던 걸까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수영#<달나라의 장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