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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비참(悲慘)은 일찍이 있었던 것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에는
안경이 걸려 있고
내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처럼
그의 눈은 깊이 파지어서
그래도 그것은
돌아가신 그날의 푸른 눈은 아니요
나의 기아(飢餓)처럼 그는 서서 나를 보고
나는 모오든 사람을 또한
나의 처를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것이요

영탄(詠嘆)이 아닌 그의 키와
저주(詛呪)가 아닌 나의 얼굴에서
오오 나는 그의 얼굴을 따라
왜 이리 조바심하는 것이요

조바심도 습관이 되고
그의 얼굴도 습관이 되며
나의 무리(無理)하는 생에서
그의 사진도 무리가 아닐 수 없이

그의 사진은 이 맑고 넓은 아침에서
또하나의 나의 팔이 될 수 없는 비참이요
행길에 얼어붙은 유리창들 같이
시계의 열두 시 같이
재차(再次)는 다시 보지 않을 편력(遍歷)의 역사……

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
(1949)


아버지란 존재는 세상의 모든 아들들에게 이중적입니다. 우선 가족 안에서 가장으로서의 권위(혹은 권력)를 지니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아들들은 그 권위 주체로서의 아버지에게 대개 복종합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아들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롤모델로 삼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지요. 이들에게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은 귀한 사표가 됩니다. 이들의 부자 관계는 따뜻합니다.

그 반대편에는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아버지이되 아버지가 아닌 사람입니다. 그럴수록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대접을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로부터 더 멀어져 갈 뿐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극복하거나 기꺼이 무시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부자 관계는 차갑습니다.

수영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애틋하면서도 미운 존재

수영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애틋하면서도 미운 존재였습니다. 가까이 하고 싶지만, 멀리할 수밖에 없는 이였지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전혀 갖지 못한 아버지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들의 부자 관계가 이렇게 된 데에는 그 배경이 있습니다.

수영의 할아버지는 매우 권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가족들이 그에게 대드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수영은 그런 할아버지로부터 절대적인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 덕분(?)에 수영은 시뻘건 얼굴로 할아버지에게 대들 수 있었지요. 그가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라는 '권위'를 극복한 배경, 나아가 세상의 모든 '권력'을 비판적으로 보게 된 불온함의 뿌리가 여기에 있지 않을런지요.

그런 수영에게 아버지 김태욱은 사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권위가 없으니 이들의 부자 관계는 냉랭하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애틋하고 살가운 추억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수영의 아버지는 세상 물정에도 어두운 사람이었습니다. 두 눈 번득거리며 자기 잇속을 챙기는 속물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두루뭉실 넘어가는 성격이었지요.

반면 그의 선친, 곧 수영의 할아버지는 구한말과 일제 초기를 거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재력가였습니다. 추수 끝무렵이면 경기도 파주와 문산, 강원도 홍천, 철원 등에서 5백 석이 넘는 볏가마들이 우마차에 실려 종로 2가의 관철동 집 대문에 길게 늘어설 정도였지요. 씨암탉과 인삼 등 소작인들의 선물도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그 모든 일은 이병상이라는 곰보 마름이 따로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1930년, 그 선친(수영의 할아버지인 김희종)이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립니다. 그러자 수영의 아버지는 자신의 형(수영의 큰아버지인 김태흥)과 함께 집안의 모든 일을 마름에게 맡겨 버립니다. 부친이 남긴 재산을 분배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형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 버립니다. 결국 수영의 부친은 철원과 임진강 부근에 있는 조그만 땅만 분배받게 되지요. 그렇다고 그 분배가 공평했는지 여부를 형에게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수영의 아버지가 다른 이와 어울리기를 즐기고 술을 좋아했다는 것도 이런 점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수영 집안 남자들의 술 내력은 조금 각별한 데가 있습니다. 그 앞자리에 수영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웃들로부터 손자(수영)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손을 잡고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술자리를 사양하는 법도 없었지요.

그의 두 아들, 곧 수영의 아버지와 큰아버지 또한 술집에 죽친 채로 살았습니다. 이들 남정네의 술 사랑을 두고 동네 사람들은 '집난술'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집안의 내력을 이어받았으니, 수영이 술을 좋아하는 것도 하등 이상하지 않습니다.

수영의 아버지는 무욕적인 삶을 살았다고도...

어찌 보면 수영의 아버지는 무욕적인 삶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반대로 그가 세사(世事)에 무관심하고 무능한 생활인으로 살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지요. 실상 수영의 아버지는 일제 말기의 간고한 생활과 해방 전후의 혼란기 속에서 그 어떤 성실한 가장의 모습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대신 집안 식구들의 생계는 온전히 그 모친의 몫으로 돌아갔지요.

그런 아버지를 둔 수영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여겼을까요. 아마도 수영은 그 힘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애틋함과 연민을 느꼈을 겁니다. 무능한 가장으로 무력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염증을 느끼기도 했겠지요. 아버지이되 아버지가 아닌 모순 속에서 심한 갈등을 느끼기도 했을 겁니다. 이 시 <아버지의 사진>에는 그런 수영의 혼란스러운 심정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이 시의 핵심 시상은 화자가 '아버지의 사진'을 '보는' 행위에 있습니다. 한 대상을 본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보는 것은 단순히 중립적인 관찰의 의미만을 갖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자, 이해와 수용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행위입니다. 보지 않고서야 어찌 그 대상을 제대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화자는 그 대상을 보되, 숨어서 봅니다. 2연 8~10행의 "나는 모오든 사람을 또한 / 나의 처를 피하여 /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것이요"와 6연의 "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가 바로 그것입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 혹은 보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화자는 '숨어 보는 것'입니다.

대체 화자는 왜 '아버지의 사진'을 '숨어 보'게 되었을까요. 마침 시의 첫머리에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실마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화자에게, 그리고 화자의 아버지에게 '비참'은 보거나 보지 않는 것과 무관하게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입니다. 보면 슬프고, 보지 않아도 '비참'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셈이지요.

이 기구한 운명 속에서 "그의 사진은 (중략) 비참이요 / (중략) 재차는 다시 보지 않을 편력의 역사"(5연)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지만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찍해지는 대상, 그러므로 아버지로 인정하면(인정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습관'처럼 '조바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3, 4연 참조) 그것은 곧 '어찌되었든 나는 그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자책이 아닐런지요. 액면 그대로 '아버지'는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화자는 결국 '아버지의 사진'을 봅니다. 보되 숨어서 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심지어는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조차도 모르게 조용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2연 8~10행과 6연에서 '그의 얼굴을 숨어' 본다고 반복해서 진술하는 화자의 처지가 안타깝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이 시가 쓰인 1949년은 수영에게 매우 힘든 해였습니다. 연극에서 문학으로 옮겨 온 지 4, 5년을 지나고 있었지만, 그의 문학적인 좌표는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박인환과 김경린 등 문학 동인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수영은 그 나이가 벌써 이십대의 끝자락에 이르렀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그 자신의 밥벌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백수 건달이었지요.

그런 그 자신의 모습을, 수영은 무력하게 살다가 간 아버지(의 사진)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닐런지요. 예의 '비참'의 근인(根因)을 '아버지의 사진', 곧 수영의 아버지가 아니라 수영 자신에게서 바라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수영#<아버지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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