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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팔자가 사나워 가지고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이렇게…."

누구 얘기냐구요? 지난 25일 제18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근혜 신임 대통령의 말입니다.

그는 지난해 대통령 후보 시절인 11월 15일 <오마이뉴스> 기자들과 만나 약 20분 가량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가 한 말들을 복기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머리말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박 대통령이 서울 광진구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열린 한국대학생포럼 주최 토크쇼에 참석했다가 "CC(캠퍼스 커플) 해봤냐?"는 한 학생의 질문에 당황해 한 날이기도 합니다.

"보수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겠다"는 박 대통령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012년 11월 15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열린 한국대학생포럼 주최 토크쇼에 참석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012년 11월 15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열린 한국대학생포럼 주최 토크쇼에 참석하고 있다. ⓒ 권우성

그것이 맘에 걸렸던지 <오마이뉴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그 얘기를 꺼내며 너스레를 떨었지요. 연애도 못해본 팔자, 그러니 결혼은 언강생심 등등 대화에 유머를 녹여내는 솜씨가 보통은 아니었습니다. 매우 딱딱하고 권위적일 거라는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간 순간이었지요.

오히려 편안했습니다. 마치 이웃에 사는 이모처럼 치졸한 내 속내를 다 꺼내놓고 툴툴 대도 다 들어줄 것 같은 넉넉하고 인자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그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지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이런저런 농담 끝에 박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왜 자신이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지에 대해 말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왜 대통령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보수 세력이 그렇게 부패하고 문제가 많은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국민들께 꼭 보여 드리고 싶고, 또 보수가 제대로 정치해서 국민들이 갖고 계신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보수가 꼭 그렇게 문제 있고 부패하고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엔 저야 뭐 정계은퇴 하겠지만요. 하하하."

박 대통령은 당시 '보수'라는 포괄적 진영논리로 아주 폭넓게 접근했지만, 실상 그의 발언에선 '아버지 시대의 정치에 대한 명예회복 심리'가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나라당 천막당사 시절 박근혜 대통령을 근접 취재했던 기자들이나 민주당 국회의원들을 만날 때마다 전해 들었던 명예회복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아주 간단 명료하게 자신이 왜 대통령이 돼야 하는가에 대해 설파한 그는 자리를 뜨면서 "진보언론인 <오마이뉴스>에서도 관심 갖고 도와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박 대통령과 그렇게 짤막한 담화를 나눈 것이 지난해 11월 15일이니까 벌써 석 달 하고도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날의 담화가 잘 잊히지 않고 자꾸 귓가에 쟁쟁 맴돕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있습니다.

말 많은 인사에 '말 없는' 박 대통령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이 18일 오전 청와대 비서진 인선안을 발표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뒤로한 채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이 18일 오전 청와대 비서진 인선안을 발표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뒤로한 채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 남소연

지난해 대선에서 박 대통령은 끊임없이 국민대통합을 주장했습니다. 100%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했었지요. 그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100%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일은 지금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책무"라며 "힘을 모으고 화해해서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나 갈등을 소신과 통합이라는 큰 용광로에 녹여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00% 대한민국과 국민 대통합을 위해 민주당의 원로 정치인들도 모셔갔지요. 그리고 진보진영의 의제들을 모조리 가져가 의제설정에 열을 올렸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담론이지요.

복지국가에 대해서는 분배만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발상, 경제민주화 담론에 대해서는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생각이라고 비판하더니 정작 선거 때는 전부 '박근혜 정치'의 동원도구로 활용했습니다.

대선과정 내내 박 대통령이 강조한 것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뿐만이 아닙니다. 새 정치도 약속했고 낡은 정치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늘 빼놓지 않는 주장이 바로 국민 대통합과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가 대통령직을 물려받기 위해 시작한 인수위, 첫 내각, 청와대 참모와 비서진 인선작업들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 주장한 국민대통합과 100% 대한민국에 걸맞나 싶을 정도로 '아버지 시대의 정치유산'을 그대로 차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국민을 보호하는 경찰청장은 차관급인데 자신을 보호하는 대통령 경호실장은 장관급으로 승격했습니다. 이것이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의 자세인지도 의문입니다. 아들 병역면제 및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논란이 된 김용준 총리후보가 자진사퇴하자 언론이 지나치게 사생활을 들춘다며 감쌌지요.

기자들이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 내정자에 대해 인수위 시절부터 국민과 소통하지 않으려는 대표적인 문제 인물로 지적했지만 결국 박 대통령은 강행했습니다.

김병관 국방장관 후보자는 예편한 뒤 무기중개업체 로비스트로 활동했고 위장전입에 투기의혹까지 제기됐지만 흔들림이 없습니다. 국민들은 김 후보자의 휴대폰에 걸린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 사진 고리가 기억 속에 꽤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그뿐입니까.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내정된 김종훈 후보자의 경우는 10년 넘게 CIA 자문위원으로 활동해온 경력이 드러났습니다. 미국 정보기관에 협력해온 의혹이 제기됐는데도 그를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으로 내정하고 철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박근혜정부의 첫 번째 내각 그 운영의 방향이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말로는 박 대통령이 100% 대한민국과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박근혜정부에서 일할 인재들은 부정비리에 연루돼 있거나 무기중개업체에서 로비스트를 했거나 미국 정보기관에서 자문하는 등 국민의 이익이나 국가의 이익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국정은 박 대통령 홀로 할 수 없는 일이며 박근혜정부의 근간을 이루는 인재들과 함께 펴나가는 것일텐데요. 이들이 일을 하는 관점이 국민과 국가보다는 박근혜 개인만 바라보며 그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갈음한다면 이것은 국민 입장에서 정말 큰일 아닌가 걱정이 태산입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국민"... 박 대통령에게도 바랍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육·해·공 3군 의장대와 군악대의 사열을 받으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육·해·공 3군 의장대와 군악대의 사열을 받으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 남소연

그는 25일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을 주요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는 "부강하고 국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경제부흥을 이루고, 국민이 행복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루겠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 중 그의 말을 100% 신뢰하는 이는 드물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의 경제지표가 말해주는 암울한 징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도 지적한 것처럼 글로벌 경제 위기 앞에 또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이 없는 가운데 과연 제2의 한강의 기적은 가능할까 회의적인 시각이 다수를 이룹니다. 그저 레토릭일 뿐이라고 냉소를 퍼붓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입니다. 그는 자신의 롤 모델을 2007년엔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 지난 대선 때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년-1603년)를 꼽았습니다. 대처는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이념적으로는 반공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며 철의 여인으로 불렸고, 엘리자베스 1세는 무려 44년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다스린 처녀여왕으로 16세기 초반 파산 직전의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 하여 꼽은 것 같습니다.

그는 지난해 MBC 100분토론에 출연해 엘리자베스 1세를 꼽은 이유에 대해 "어려서 고생을 많이 했고 음모도 있었지만 잘 참아내 사려 깊은 지도자가 됐다, 자신이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늘 관용의 정신을 갖고 합리적으로 국정을 운영했으며 파산 직전의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변화된 시대에 따라 그의 국정운영 롤 모델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조차도 대처에서 엘리자베스 1세로 롤 모델을 바꾼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핀란드의 전직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Tarja Halonen·70)을 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는 2000년 2월 핀란드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첫 임기 6년 동안 지지율이 최고 88%에 달했습니다. 전폭적인 국민적 지지로 2006년 연임에 성공했고 무려 12년간 국정을 이끌고 지난해 퇴임했지요. 퇴임할 때 지지율이 80% 이상을 유지했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할로넨의 별명은 '무민 마마(moomin mama)'였습니다. 핀란드의 동화작가 토베 얀손이 만든 캐릭터로, 안전한 보금자리를 돌보는 엄마의 모습이지요. 가족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언제든 다른 사람을 도울 준비가 돼 있는 그런 대통령이었습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땐 중재에 나서고, 핸드백에는 항상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다녀 '무민 밸리'의 사람들은 무민 마마를 신뢰한다는 것이지요.

핀란드 국민들이 보는 할로넨 전 대통령의 이미지는 평범한 '아줌마' 같은 소박함과 친근함입니다.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비싼 호텔 서비스 대신 직접 옷을 다림질하고 머리를 매만졌다는 일화도 알려져 있습니다.

할로넨은 헬싱키 내의 전통적인 노동자 거주지역인 칼리오에서 용접공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로 변호사가 되고 국회의원과 장관을 거쳐 대통령까지 됐지만 그 자신 스스로 '서민'이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에 입문한 뒤에는 남녀평등과 동성애자 차별금지 등 소수자들의 인권 보호에도 앞장섰고, 일부 관료들이 동성애자이면서도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고 해요.

할로넨 전 대통령 재임시절 핀란드는 국가청렴도 1위, 국가경쟁력 1위, 학업성취도 국제비교(PISA) 1위, 환경지수 1위 등 각종 최고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그는 리더의 조건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하며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얘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국민이다."

박 대통령도 필경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떠날 때 박수 받으며 떠나고 싶은 역사적 인물이 되고 싶겠지요. 그렇다면 그는 지금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박근혜#무민 마마#할로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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