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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5일 오후 2시. 용산 재판 항소심이 검찰 측의 기피 신청으로 연기되었다가 드디어 다시 시작되었다. 증인으로 나온 용산 경찰서 고위층 간부 3명. 하나같이 발뺌하기에 바빴다. 이제껏 보아 왔듯이 그들은 증언을 빙빙 돌리며 시인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2시에 시작된 재판이 끝난 후 8시 50분에 구치소에 도착했으니 취침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셈이다.

전에는 방청석을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번에는 자리배치를 정면으로 보게 해놓았다. 그래서 처가 어디쯤 앉아있는지 볼 수 없었다. 재판이 끝나고 나올 때 방청석 중간 지점에서 손을 흔들며 맞이하는 처의 얼굴을 대하니 기뻤다. 나를 위해 긴 시간 앉아 있었을 처를 위해서라도 이 재판에서 진실을 밝혀 하루라도 빨리 출소해 만났으면 한다. -<꽃피는 용산>에서

2009년 1월 19일. 용산4지구 철거민 세입자 20여 명이 한강로 남일당 건물 4층에서 망루농성에 돌입한다. 강제철거 중단과 철거민 주거 생존권을 요구한 농성이었다. 이에 경찰은 경찰특공대 등 1600여 명의 인원을 배치하는 강제진압에 나선다.

 <꽃피는 용산> 겉표지
 <꽃피는 용산> 겉표지
ⓒ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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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진압은 다음날(20일) 새벽으로 이어진다. 어느 순간 철거민들이 농성 중이던 건물은 커다란 불길에 휩싸이고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한다. 용산참사 그 대략이다. 

1984년부터 용산에서 금은방을 하던 김재호씨도 다른 철거민들과 함께 농성했다. 말도 안 되는 평가 금액으로 내쫓길 판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났다.

2009년 2월 9일, 검찰은 철거민 7명을 구속기소하고 15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짜맞추기 수사발표를 한다. 죽은 사람들을 살인범으로 몰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죄를 씌우는 수사 발표였다.

김재호씨도 살아남은 또 다른 사람들과 '도심테러리스트'라는 죄목으로 구속 기소된다. 그리고 징역 4년을 구형받는다. 그리하여 서울구치소와 공주교도소에서 3년 9개월을 복역한 후 만기출소 3개월을 앞둔 지난해(2012년) 10월 26일, 다른 한 명과 출소했다.

김재호씨, 살아남은 또 다른 사람들과 '도심테러리스트'라는 죄목으로 구속

그가 수감되던 당시 그에게는 아내와 9살짜리 딸이 있었다. 하루종일 아빠 뒤만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아빠를 유독 표나게 따랐던 그런 딸이었다. 그가 늦둥이로 본 어린 딸은 아빠의 구속과 그로인한 부재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까지 가게 된다. 평범한 소시민에서 범죄자가 되어 수감된 그 역시 충격이 컸다고 한다. 가장으로서 밖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또한 클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된 딸에 대한 걱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그는 딸이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고 그에 사연을 적는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염려, 아빠로서의 당부 등을 담은. 그리고 1주일에 2~3편씩 딸과 아내에게 보내게 된다.

가정을 파괴하는 범죄자 가운데는 여러 부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제일은 아동유괴와 성범죄자일 것이고, 살인자도 거기 속할 것입니다.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사기범도 있는가 하면, 힘들게 키워주신 부모의 은혜도 모르는 폐륜아도 있습니다. 직접 몸에 해를 가해야만 폭력은 아닙니다. 무죄인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한다면 이 또한 범죄입니다. 많이 배웠다는 무기로 높은 자리 꿰차고 앉아 한마디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그들이야말로 더 흉악한 가정파괴범이 아닐까요?

그들 마음대로 법을 만들고 용산철거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탄 철거민에게 살인자라는 죄명을,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뛰어내린 이에게도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이 더러운 세상. 모두가 다 아니라고 하는데 왜 그들만 그렇다고 합니까? 이들 모두가 가정 파괴범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꽃피는 용산>에서(기자 주:만화 내용 중 저자의 독백을 정리)

<꽃피는 용산>(서해문집 펴냄)은 김재호씨가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400여 통의 만화편지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출간 소식이 반가웠던 책인지라 읽던 중 지인에게 이 책의 존재를 알려줬다. 그랬더니 그는 "그럼 딱딱한 시사만화?"라며 반문, 지레짐작으로 단정하고 만다. 아쉽게도 말이다. 아마도 '용산 참사'란 무겁고 우울한 주제를 담은 책으로 한순간 오해했나 보다. 그런데 이 책은 시사만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의 의미가 무엇이고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내용이 훨씬 많은, 그래서 읽는 동안 가슴 뭉클하게 하는 그런 만화다.

"용산참사 만화, 딱딱한 시사만화?"

 김재호씨의 편지 일부분.
 김재호씨의 편지 일부분.
ⓒ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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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다섯 살 때 일입니다. 물놀이 다녀온 혜연이 얼굴에는 잠이 가득하더군요. 그런데 막 꿈나라로 들어선 혜연이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말하더군요.

"엄마 내 등에 똑-똑-똑 해주세요."
"왜 등을 두드려? 소화가 잘 안 되나?"
"아니 등에서 자꾸 땀이 나오잖아. 땀이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똑똑 해주세요."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시키는 대로 했지요.

"똑똑 혜연이 등아 땀 다시 들어가도 되니?"
"네! 들어오세요! …엄마 고마워. 엄마 덕분에 이젠 덥지 않아요."

나는 귀여운 그 모습에 혜연이를 꼭 안아주었답니다. -<꽃피는 용산>에서

이처럼 빵! 터지게 웃으며 읽을 정도로 천진무구한 동심이 가득한 이야기나 가족들의 즐거운 에피소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가 바탕이 된 이야기 등이 훨씬 더 많으니 말이다. 물론 저자가 옥중에서 겪은 이야기나 용산참사에 대한 억울한 심정이나 용산참사와 같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양산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 등에 대해 쓰고 있기도 하지만.

이런지라 따뜻하고 소소한 일상을 진솔하게 담은 만화 한 권을 읽는 재미와 감동을 만나는 한편, 누구보다 당사자가 그에 대해 말하고 있어 미처 알지 못한 용산참사의 여러 부분을 알게 되어 의미가 남다른 그런 책 읽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어느덧 용산참사 4주기가 지났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했으며, 피해자들은 여전히 차가운 길에서 농성 중이다. <꽃피는 용산>은 피해자이자 당사자가 용산참사의 진상과 억울함, 그로 인한 한 가족의 아픔 등을 세상에 최초로 내보인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이 부디 용산참사를 제대로 아는 데, 나아가 용산참사를 해결하는 소통의 도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덧붙이는 글 | <꽃피는 용산>ㅣ김재호 (지은이) | 서해문집 | 2013-01-19 ㅣ정가 16,000원



꽃피는 용산 - 딸에게 보낸 편지

김재호 지음, 서해문집(2013)


#용산#남일당#망루농성#철거민#용산4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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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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