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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은 작년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내놓은 보고서(CEO Information 제855호. 류지성 외 3명; 이하 '보고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보고서는 2012년 5월 30일자로 나왔다. 근 8개월 전이다.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그 사이에 우리나라가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하는 세상' 쪽으로 조금 옮아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학교에 찾아온 내 제자들은 묻기도 전에 대학생활의 팍팍함을 이야기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공부와 시험에 미칠 것 같다는 말을 예사로 한다. 고등학교 때 공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헛웃음을 내놓는 아이도 있다. 한 가닥 '성공'의 희망을 안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조차 '성공'은 찾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실상이 그러한데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아래는 보고서에 실린 '요약'과 '목차'다.

(가) 요약 
대학교육의 국민경제 기여도가 감소하는 추세이며, 과잉진학으로 인한 기회비용이 연간 최대 19조원에 달한다. 대졸 과잉학력자 42%가 대학진학 대신 취업하여 생산활동을 할 경우 GDP 성장률은 1.01%p 상승할 것으로 추정된다. 과잉학력의 악순환 차단을 위해 고졸자에게 적합한 일자리 개발, 능력중시 인사, 교육의 질, 학력중시 풍토 개선이 필요하다. 

(나) 목차 
Ⅰ. 과잉학력의 현주소
Ⅱ. 대학에 갈 수밖에 없는 현실
Ⅲ.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하는 세상'을 위한 4大 과제 

한 마디로 지금 우리나라의 대졸 학력자 중에 '잉여'가 많다는 말이다. 쓸데없이('과잉'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높은 학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으니 대학에 가지 말고 곧장 취업을 하라는 얘기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20대 청년 구직자를 향하여 눈높이를 낮춰 취직하라며 따뜻하게 조언한 담화의 연장이다. 4년제 대졸자를 기준으로 과잉학력에 따른 1인당 기회비용이 1억 2,000만 원이라는 친절한 분석이 그냥 나왔겠는가. 아까운 데 돈 들일 일 만들지 말고 취직해서 그 돈 아끼고 월급으로 돈 모으라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10명 중 7, 8명 정도가 대학에 들어가고 있다. 2012년은 7.2명이었다. 물론 그 비율은 최근 몇 년 간 제법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외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경이로운 수준이다. 미국 64%, 일본 48%, 독일 36% 등과 비교해 보라. '진짜 경쟁력'은 오히려 대학 진학률이 낮은 데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런데도 최근 2년 간의 4년제 대졸자 취업률은 60%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2011년 54.5%, 2012년 56.2%).

없는 살림에 취직 좀 해보겠다고 대학에 들어가 수억 원 들여가며 공부를 하지만, 졸업하면서 청년 백수가 되는 이들이 열 명 중 네 명 이상이나 되는 것이다. 대학원 진학자 등을 뺀 실질적 취업률로 따지면 40% 정도밖에 되지 않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이 나라 최고라는 서울대(61%)조차 '지잡대'의 하나인 원광대(66.8%)보다 낮았다.

우리나라는 학력 사회다. 솔직히 이력서에 '대졸' 두 글자라도 없으면 서류 심사조차 통과하기 어려운 나라가 대한민국 아닌가. 그러니 너도나도 대학을 진학하는 것이다. 학자금 융자네 뭐네 하며 빚까지 내는 이유도 이런 데 있지 않는가. 하지만 대학을 마쳐도 백수로 지내게 되니 '묻지 마' 대학 진학이 분명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에 대졸자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건 당연하다. 과거와 비교해 보면 이를 금방 알 수 있다. 40년 전 우리나라 성인 중 대학 졸업자는 열 명 중 채 한 명도 되지 않는 0.7명 수준이었다. 그랬던 것이 2010년에는 10명 중에 4명이 대졸자인 세상이 되었다. 40%면 과반에 가까운 수치이니 지나가는 사람 절반 정도를 대졸자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 셈이다. 삼성과 같은 대기업 보고서나 이명박 대통령이 과잉 학력이라며 혀를 찰만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과잉 학력이 과연 그 '잉여'들만의 탓인가. '잉여'들이 오죽 할 일이 없어서 한 해 천 만원 가까운 돈을 들여가며 대학을 다니겠는가. 앞서 말했듯 우리나라는 학벌과 학력이 없으면 어디 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곳이다. 겉으로는 능력을 중시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인맥 네트워크를 강조한다. 학벌과 학연을 따지는 것이다. '지잡대' 졸업장이라도 따놓지 않으면 불안한 이유다.

과잉학력사회의 책임은 맨 먼저 정부가 져야 한다. 다른 교육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대학 정책을 포함한 고등교육 정책은 한 나라의 기초 학문 육성과 발전 방향 등을 고려한 거시적인 안목 속에서 짜여야 한다. 양적 측면을 중시하는 정책보다 질적 관리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정부는 1995년에 대학 설립과 정원 자율화 등을 포함한 5. 31 교육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고등교육 정책의 방향을 올바로 잡지 못하고 거꾸로 가게 만든 것이다. 대학이 많지 않으면 아무리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도 그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대학 설립과 정원이 자유롭게 되어 대학이 많이 생겨나자 바뀌게 되었다. 애초 대학 진학에 뜻이 없는 사람들도 대학 진학을 고려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부존 자원 없는 우리를 살리는 길은 교육뿐이라며 '공부', '진학'을 외친 이들의 책임은 없는가. 언론이 특히 그렇다. 이들에게는 무조건 공부하고 진학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들은 어떤 공부를 하고 무엇을 위해 진학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SKY에 진학하는 아이들의 숫자를 놓고 고등학교의 우열을 따지는 일만 했을 뿐이다. 이런 행태는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학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사회 분위기 또한 심각하다.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최고 학벌이라는 SKY를 욕하면서도 정작 그곳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첫 만남에서 학번과 출신 대학으로 서로 간의 관계를 설정한다. 특정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로 승진 과정에서 엄청난 특혜를 입기도 한다. 학력이 그 사람의 전부라는 시각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런데 보고서의 결론이 고약하다. 가령 첫 번째 과제인 일자리 개발과 관련해서는 고졸자에 맞는 일자리를 개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를 위해 연구개발 관련 직무나 엔니지어직 등 그럴듯한 일자리와 함께 뿌리산업의 숙련직 등을 그 예로 든다. 이 뿌리산업이라는 이름이 멋지지 않은가.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하는 세상>(2012년 5월)의 표지 사진.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하는 세상>(2012년 5월)의 표지 사진.
ⓒ 삼성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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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산업은 주조, 금형, 열처리, 용접 등과 같이 산업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이고 중요한 분야다. 하지만 이 뿌리산업은 지금 최악의 3D 업종으로, 젊은 구직자들에게는 기피 1순위의 산업 분야가 되어 있다. 그래서 보고서는 이 분야에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마나한 당연한 소리 아닌가. 뿌리산업은 그 말만큼이나 우리 산업의 근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뿌리산업이 왜 고졸자에게만 적합한 일자리여야 하는가. 그렇게 우리 산업의 근간이 되는 분야라면 대졸자도 맡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 나는 이 보고서에서처럼 고졸자와 대졸자를 나누는 관점 자체를 문제삼고 싶은 것이다. 아주 삐딱하게 말해 대졸자와 고졸자를 노골적으로 나누어 고졸자는 대졸자의 영역에 기웃거리지 말란 말 아닌가.

하지만 이런 식의 과제 해결로는 과잉학력의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고졸 용접공에게 아무리 많은 돈을 주더라도 고졸자와 대졸자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우수한 고졸 용접 기술자를 얻기 힘들다. 용접공이든 교수든 이들은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고 소중한 노동자들이다. 노동(자)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과잉학력의 문제를 풀 수 없다.

핀란드의 수도 배관공과 교수 월급은 별로 차이가 크지 않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도 별다른 차별 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기술학교(우리나라로 치면 몇 년 전 '마이스터고'로 바뀐 실업계 고교에 해당한다)를 다니면서 현장에서 도제 과정을 마친 고졸자들이 사회적으로 아주 높은 위상을 갖게 된다는 말도 들었다. 이들은 실제 사회에 나가면 경제적으로도 높은 대우를 받는다.

우리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이라는 전제를 무턱대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우선 그 말을 하는 이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지부터 따져 보라. 만약 그것이 단순하게 '돈'의 문제와만 관련된다면 다시 물을 필요도 없다. 돈의 문제로 성공을 재기 시작하면,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이 4만 달러가 아니라 8만 달러가 되어도 그 '성공'은 결코 실현되지 못한다.

대학과 고등학교를 각각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가 대학과 고등학교를 학문적인 우열이나 주종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두 말 할 나위 없이 사기꾼이거나 교육학적인 백치다. 못 말리는 학력주의자가 아니면 대학과 고등학교 동문회에 사활을 거는 학벌주의자일 가능성도 높다. 그는 한 마디로 크게 신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대학은 대학이고 고등학교는 고등학교다. 대학은 기초 학문에 대한 창의적 연구를 통해 사회 발전과 혁신의 실마리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고등학교는,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교육과정 입안자들이 잘 명시해 놓은 것처럼, 서로 협력하고 소통하는 민주 시민을 길러내는 곳이다. 그 각각 하는 일이 이렇게 명백하게 다르다. 왜 고등학교가 대학교에 종속되어야 하는가. 또 마찬가지로 대학은 왜 기업에 설설 기어야 하는가 말이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먼저 대학과 고등학교, 대졸자와 고졸자 사이의 차별이 철폐되어야 한다. 일자리와 급여에 관한 한, 대졸자와 고졸자 사이에 그어져 있는 지금의 거대한 장벽이 대대적으로 허물어져야 한다. 일자리 장벽을 완전히 없애기 힘들다면 급여의 장벽만이라도 깨끗하게 없애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일자리 장벽의 문제도 어느 정도 상쇄될 것이다.

학력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내가 거쳐온 배움의 길[學歷]'이 아니라 '내가 배워서 갖게 된 능력이나 배울 수 있는 힘[學力]'에서 진짜 학력의 의의를 찾아야 한다. 보유하고 있는 지식의 양으로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지금은 상호 소통과 협력 과정에서 각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 토론하고 더불어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경쟁력'을 갖게 되는 시대다. 이미 배운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개방적인 태도가 중요한 세상이다. 스티븐 잡스가 대졸자여서 그렇게 '대박'을 냈나. 고졸자와 대졸자의 구별은 전혀 무의미하다.

한 사람의 진정한 능력은 학력(學歷)에 있지 않다. 당연히 기업들이 원하는 진짜 인재도 좋은 스펙을 가진 고학력자가 아니다. 2012년 5월, 컨설팅 회사인 밀레니얼 브랜딩사가 미국의 225개 회사를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고용주들이 원하는 구직자의 조건으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은 소통 능력(98%)이었다. 그 다음으로 긍정적 태도(97%)와 타인과의 협력(92%) 등이 뒤따랐다.

우리나라 최고 기업이라는 삼성이 바라는 인재상도 비슷하다. 삼성의 인재상은 창의와 열정, 소통을 갖춘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말라며 손을 내저을 만한 자질들이다. 혹여 이렇게 겉으로는 창의와 열정을 부르짖지만 삼성의 '핵심'과 '실세' 자리들은 여전히 특정 학벌이나 학력이 움켜쥐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이 시대에 진짜 필요한 능력과 경쟁의 조건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지 않는가.

우리에게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하는 세상'은 필요하지 않다. 이 말 속에는 대졸이든 고졸이든 학력이 성공의 조건이라는 전제가 숨겨 있다. 그렇다면 학력이 그보다 낮거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를 벗어나는 한 해 6만여 명 규모의 학생들은 도대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성공해야 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하는 세상'이 아니라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성공하는 세상'이 아닐까. 학교 교육을 철폐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학교에서의 배움을 무시하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만 공부하고, 사회에 나갔을 때 그 공부한 정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능력에 맞게 대우 받으면 살게 하자는 것이다.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데 기여하는 세상은 얼마나 야만적이고 절망스러운가.

* 이러한 점 외에 '보고서'의 문제점과 오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의 강인규 교수가 쓴 <망가뜨린것 모른척한것 바꿔야할것>(2012, 오마이북)의 233~241쪽을 참고하기 바란다.
** 한국교육개발원이 2012년 9월 11일 발표한 '2012년 교육 기본통계'에 따르면, 2012년 대학 진학률은 71.3%였다. 정점을 찍었던 2009년의 77.8%(합격자 기준 81.9%)에서 2010년 75.4%(합격자 기준 79.0%)을 거쳐 2011년 72.5%에 이어지면서 3년 연속 하락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언론이 전국의 '우수' 고등학교를 탐방하고 쓰는 기사들을 유심히 보라. 이들 기사에서 학교 교육의 성패는 결국 대학입시 실적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이것은 심지어 대안학교의 의의를 조망하는 기사나 프로그램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서는 글을 달리해서 꼼꼼하게 따져볼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과잉학력#학력 철폐#대졸자#고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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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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