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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교사를 가르치는 전문가라고 한다. 일견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말에 딴죽을 걸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교사가 되는 일은 쉽지 않다. 교사가 되려는 이는 먼저 교대나 사대에 입학해야 한다. 그곳에서 이른바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과 태도, 기술 등에 대하여 4년을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한 치의 가감이나 차착도 없이 '피 터지게' 공부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만다.

'페북'에 있는 올라오는 소식들을 보면, 제자들 중에서도 교대나 사대 간 녀석들이 시험이며 성적 타령을 제일 많이 한다. 나는 그들이 언제 친구를 만나고 밥을 먹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공부 양으로 친다면 박사급(물론 공부 안 하는 박사들은 빼고!) 이상이다.

그 지난한 과정의 끝에는 교직에 입문하기 위한 교원 임용 고사가 기다린다. 그런데 이 시험, 아주 살인적인 경쟁률을 자랑한다. 한두 명 모집에 수백 명이 몰려든다. 그러니 수 년 동안 헛고생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재수며 삼수는 기본 중에 기본이다.

그런데 이 살벌한 시험을 위해서 이들은 가르치는 일을 다시 한번 깊게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 교원 임용 고사는 시도교육청에 따라 차이도 있고 과거에 비해 한결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시험은 가르치는 일에 대한 이런저런 잡다한 지식과 기술을 기준으로 지원자들을 평가한다. 이를테면 수업 시연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수업 시연은 대개 교원 임용 전형 과정의 3단계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전형 응시자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채 20분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10여분의 시연으로 평가하는 교육청도 있(었)다. 문제는 그 평가의 초점이 온통 교사가 아이들을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잘 짜여 있고 효율적인지 등에 맞춰진다. 교원 임용 고사는 말 그대로 가르치기 전문가를 뽑는 시험이다.

어찌되었든 그 살인적인 경쟁의 과정도 뚫고 드디어 교사가 되어 학교 교문에 들어선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다. 자고로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교사가 학교 조직에 입문하면 가르치는 전문가가 되기 위한 화려하고 다채로운 배움이 장이 펼쳐진다. 그것은 이들이 지금까지 거쳐온 그 어떤 '가르치는 일 배우기'보다 더 다채롭고 화려하다. 각종 교내외 연수가 바로 그것이다.

목하 학교 현장은 교원 평가와 학교 평가, 성과급 등급화 등의 대외적인 조건과도 마침 잘 맞아떨어져서 각종 배움의 열기로 가득하다. 배우지 않으면 도태되고 낙오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배움은 대체로, 아니 거의 모두 잘 가르치는 일에 초점이 맞춰진다.

교장이나 교육 관료와 같이 교사가 아닌 이들이 보기에 교사들은 여전히, 아직, 잘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잘 가르치는 일에 대한 열병과도 같은 욕망은 식을 줄 모른다. 최근 5, 6년 사이에 교직 사회에 들불처럼 유행하고 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교사들의 대학원 진학이 그것이다.

어찌보면 바람직한 일이다. 기실 명색이 '교직은 전문직'이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학 4년과 임용고시 몇 년의 준비만으로 그 일을 훌륭히 수행하기는 힘들 터. 석사 과정에든 박사 과정에든 진학하여 새로운 교육 이론을 살피고, 이를 자신의 교육 활동을 되비추는 데 활용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교육 활동을 좀더 전문화하는 일은 아주 중요해 보이는 일 같기도 하다.

문제는 교사들의 대학원 진학이 그런 '교육적인' 취지나 목적만으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학교 현장을 황폐화하는 교원 평가와 성과급의 칼날 아래서 어떻게든 생존해보려는 교사들의 몸부림이랄까. 바로 그런 것이 일과 후의 교사들을 대학원 강의실로 몰아넣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어찌됐든 이 모든 일은 표면적으로는 가르치는 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것으로 포장된다.

학생이나 학부모와 같이 교사가 아닌 이들이 보기에 교사들은 여전히, 아직, 충분히, 잘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쯤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교사가 과연 가르치는 전문가인가? 또는 교사가 꼭 그런 존재여야 하는가?

교육학의 세계적인 명저인 <페다고지>의 한 대목을 보자. 저자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1977)는 이 책의 제2장 도입부에서 은행 저금식 교육에 대해 언급한다. 은행 저금식 교육에서 교사와 학생은 설명하는 주체와, 인내심을 가지고 그 설명을 듣는 객체로 분리된다. 교사는 설명 내용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학생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나 용기 구실을 한다. 이는 교사가 예탁자가 되어 학생이라는 보관소에 지식을 예금하는 행위와 다름 없다.

프레이리는 이와 같은 은행 저금식 교육이 낳는 태도와 습관을 열 가지로 정리해 놓았다. 그 중 처음 다섯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운다.
교사는 모든 것을 알고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교사는 생각의 주체이고 학생들은 생각의 대상이다.
교사는 말하고 학생들은 얌전히 듣는다.
교사는 훈련을 시키고 학생들은 훈련을 받는다. 

모든 핵심적인 교육 활동의 주체가 전부 교사로 되어 있다. 학생들은 오로지 객체이자 대상일 뿐이다. 이들은 모든 활동에 수동적인 태도로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얌전히 교사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여기서 프레이리가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운다"를 열 가지 중 첫 번째 자리에 놓은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 즉 '교사=가르침의 주체, 학생=배움의 주체'가 실상은 진정한 교육 활동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터! 실상 한자어인 '교사(敎師)'와 '학생(學生)'이라는 단어가 그와 같은 '상식'을 공고히 하고 있다.

교육은, 그러나, 프레이리 자신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는 일로써 완수되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교육 활동의 전부인 것마냥 얘기해서는 안 된다. 교육은 (그 어떤 탁월한 교육학자라도 정확하게 그 전모를 알기는 힘들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일 이상의 '어떤 것'을 담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교육이 본질적인 의미에서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가르치고 배우는 일 그 이상의 '어떤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어떤 것'을 추구하는 교육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또 어떻게 세워야 하나?

오늘날 통상적인 교육 활동의 대부분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학교 제도는 19세기 초반 독일에서 비롯되었다. 1806년에 독일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가 쓴 '독일 국민에게 고함(Address to the German Nation)'이라는 글이 그 출발점이다.

피히테가 이 글에 밝혀놓은 논점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했다. 국가가 의무 학교 교육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를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1819년에 프러시아(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3세가 독일 북부 지역과 폴란드 서부 지역 일대를 중심으로 세운 왕국. 1871년에 독일을 통일함)는 중앙집권적이고 현대적인 체제를 갖춘 학교 제도를 갖추고 그 교육 목표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힌다.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고분고분한 광산 노동자
정부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어떤 인간상이 그려지는가? 그렇다. 근대 학교 제도가 길러내는 인간형은 스스로 생각하거나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다. 세상 일에 대해서 결코 그 자신의 목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스스로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주인'이 아니라 어떤 다른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노예'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작년(2012년), 어느 반에 수업을 하러 들어갔을 때의 광경. 아이들이 가장 생기 있는 점심 전 교시였는데도 모두 ‘좀비’가 되어 엎드려 있다. 이 가공할 대한민국 교실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작년(2012년), 어느 반에 수업을 하러 들어갔을 때의 광경. 아이들이 가장 생기 있는 점심 전 교시였는데도 모두 ‘좀비’가 되어 엎드려 있다. 이 가공할 대한민국 교실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 정은균

이러한 점을 따르는 한, 학교에서 배출되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노예'와 다름 없다. 학교는 학생들을 주인에게 철저히 예속된 노예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주입해 넣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로 학생들은 묵묵히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교사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는 이 '상식'은, 인류가 문명을 만들어 진보하기 시작한 저 먼 옛날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이다. 실상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있기는 할까?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불과 200년밖에 되지 않은, 대단히 많은 문제 투성이를 안고 있는 만들어진 제도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고 한계가 분명하다면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혁파하거나 뜯어고칠 수 있는 것이다.

교사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는 이 '상식'의 문제를 따져 보자. 교사가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가르칠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학교 교육의 시원에 있는 피히테의 프로젝트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학생을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노예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기존 질서나 체제에 반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새' 것이 아니다. 완고하게 보수적인 교사에게는 기존의 것을 살짝 바꾼 '약간 새로운' 것조차도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결국 학생을 노예로 만드는 교육은, 그리고 이를 위해 교사가 가르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진보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르침으로는 자기 변화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 변혁은 꿈조차 꿀 수 없다.

교사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는 교육은 기존 체제를 굳게 한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교육이 발 붙일 곳은 찾기가 쉽지 않다. 학생들은 교사의 치밀한 조작에 따라 작동되는 기계와도 같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하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바꿔 말하는 일은 힘들다. 아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사가 가르침이라는 굳은 옹벽의 틀 속에 갇혀 있는 한 학생들이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되는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실상 교사가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내 말을 가르치지 말자는 주장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나는 교사의 가르침이 교육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현실에 딴죽을 걸고 싶은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만으로 교육이 완성된다면 학교며 교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른바 '듄(ebs)'을 최대한 활용하고, 완벽한 인강 시스템을 갖춘다면 각자 자신의 방안에서 모니터만 들여다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현실이 그렇지 않음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교사는 알지도 못하는 그 누구, 가령 교육(교과) 과정 입안자나 교과서 집필자 등이 정해준 무언가를 가르친다. 그것이 어떤 의의가 있으며, 교실 현장에서 아이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 많은 교사는, 으레 자신이 그렇게 가르치면 아이들은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 타협이란 없다.

학생들은 두 부류다. 한 부류는 교사의 가르침을 무작정 받아들인다. 물론 그것은 대부분 지식에 대한 사랑이나 배움을 향한 열망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런 '무작정'이 성적과 대학 입학에 유리해서다. 또 다른 부류는 교사의 가르침을 거부한다. 이들에게 교사의 가르침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것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그리고 삶에 별다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중에도 성적의 압박을 느끼는 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성적의 현실적인 영향력과 이를 중시하는 교사, 부모 등의 시선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교사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배움에 대한 관심이나 흥미를 잃어가면 갈수록 성적은 그 어떤 위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가르침을 거부하고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아이들은 사토 마나부 교사의 말마따나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글을 끝맺자. 교사는 가르치는 전문가가 아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교사는 가르치면서 배우는 존재여야 한다. 교사가 가르치는 전문가가 되면 학생이 소외된다. 주체가 되지 못하고 대상으로 전락한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교사는 떠먹여주고 학생은 그저 받아먹기만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이것은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식으로 말해 학생들에게 '소화제'나 '영양소' 같은 것이다. 그러니 좋은 게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소화제나 영양제는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나 좋은 일이다. 위장 기능이 튼튼하여 탁월한 소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소화제는 불필요한 약물 남용의 원인이 될 뿐이다. 영양이 풍부한 이에게 주입되는 영양제는 독으로 기능하지 않겠는가. 교사의 가르침이, 그리고 가르칠거리가 모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교사가 가르치면서 배우는 이가 되기 위해서는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눈을 맞춰야 한다.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배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교사와 학생의 대화와 밀접한 소통 등의 상호 작용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교사의 입에서는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9~1988, 미국 소설가)의 소설 <대성당>에 나오는 주인공이 맹인과 함께 눈을 감은 채로 성당 그림을 그린 후 내뱉은 짧은 말,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와 같은 감격스러운 대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이다.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자! 그들과 단 한 번이라도 눈을 마주치고, 이름을 불러 그들의 입에서 단 한 마디의 말이라도 나올 수 있게 하자. 새 학년 새 학기를 맞게 되면 학생들 이름부터 외우자. 아직은 개학이 먼 이 한겨울에 뜨겁게 외치고 싶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http://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교사#가르치는 전문가#파울루 프레이리#피히테#<페다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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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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