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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문항 때문에 국가 중대사에 문제가 생긴 나라가 한국만은 아니다. 스코틀랜드 독립과 관련해서 영국은 올해 내내 골머리를 앓았다. 문제가 된 유형도 비슷하다. 질문을 한 가지로 할 것인가, 두 가지로 할 것인가? 질문 문항은 어떻게 할 것인가?

2007년 지방선거에서 스코틀랜드 민족당(SNP)이 독립을 공약의 하나로 처음 내세웠다. 2011년 SNP가 스코틀랜드 의회를 압도적 다수로 장악하자 이것은 곧바로 중대한 정치 현안이 되었다.

2007년 과반을 넘지 못하고 1당에 그쳤던 SNP는 스코틀랜드 자치 의회내에 '독립위원회'를 만들고 2년여에 걸쳐 백서를 준비해서 2009년 발간했다. 독립의 방식으로는 국민투표가 제안되었다. 그리고 작년 선거 결과 SNP 단독 정부가 수립되자 스코틀랜드 의회는 공약대로 백서를 이행하겠다고 천명했다.

이에 대해 영국(United Kingdom) 법무부가 주도한 학계의 법리 논쟁이 있은 후, 관련 입법 내용이 합당하면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부는 올해 1월에 서둘러서 스코틀랜드 의회에 관련 입법을 준비할 것을 제안하고 그 가이드라인도 제시했다(국민투표의 통과가 곧바로 독립의 확정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 아직 법적 논란이 있다).

이후 가장 첨예한 문제는 질문의 가짓 수와 종류였다. 백서에 따르면, 질문은 먼저 독립에 찬성하느냐를 묻고, 두 번째로 완전한 독립인가, 연방의 하나로 남을 것인가(가령 캐나다나 호주처럼)를 묻는 것이었다.

물론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질문이다. 이렇게 되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무난히 통과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SNP는 국민투표를 두 번에 나눠서 하자고까지 제안했다.

올해 10월까지 꽤 오래 이어진 협상에서 결국 질문의 종류는 한 가지로 조정되었다. 여기에는 국민투표가 사실상 2단계의 형식을 갖게 되면, 무엇을 묻는 것인지에 대해 확정하기 곤란하다는, 즉 논증의 형식이 불합리하다는 논리철학자들의 다수 의견이 영향을 미쳤다(이 '논증 형식의 불합리성' 문제는 올해 내내 영국에서 철학, 헌법, 정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사안이었고, 정쟁이나 여론에 끌려다니지 않고 비교적 명백하게 결판이 났다).

이제 두 번째 문제는 질문의 문항이었는데, "스코틀랜드가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데  찬성하십니까? Do you agree that Scotland should be an independent country?"에서 "찬성하십니까? Do you agree"가 긍정적인 답변을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에 따라서, "스코틀랜드가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Scotland should be an independent state: I agree/I disagree?"로 바뀌었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영국이 뭘 잘하고 한국이 뭘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스코틀랜드 자치와 독립은 많은 부분에서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SNP가 스코틀랜드의 지유와 이익을 위한 정당이라기 보다는, SNP의 정치인들이 스코틀랜드를 자기 정당의 정치적 이익에 이용한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도 충분히 정치적인데, 가령 SNP가 선거시기로 주장해서 관철시킨 2014년은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윌리엄 월레스의 죽음으로 스코틀랜드가 똘똥 뭉친 반녹번 전투의 700주년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현행 18세 이상으로 되어 있는 투표자 연령도 16세 이상으로 변경했다. 젊은 유권자들의 독립 찬성 비율이 전체 평균에 비해 확실히 높기 때문이다.16세로 투표연령이 낮아질 경우 추가되는 유권자는 약 12만 5천명이고 전체 유권자의 3%에 해당한다(16세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투표가능 연령으로, 오스트리아, 브라질, 쿠바, 에콰도르, 니카라과 등 만이 채택하고 있다).

어쨌든 아무리 겉으로 고상해보이는 '정치적' 목표라고 할지라도, 소위 말하는 '정치적' 수단도 전부 다 동원된다. 물론 여기에 선의가 없어서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누구보다 마키아벨리가 지적한 정치의 본질이기도 하다.

여론조사로 무엇인가를 결정한다는 것, 특히 대단히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한국에서도 여러 정치학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는 신뢰성과 공정성, 결과에 대한 승복, 더 본질적으로는 일시적이고 불확정적인 여론조사로 그런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듯이 절차적 합의라는 도구적 사안도 상당한 걸림돌이 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이해 당사자들 간에 상호성에 기초한 절차적 합의의 전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절차적 합의는 운 좋게도 '극적'으로 타결되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상당한 상처를 안겨주게 된다.

'아름다운 단일화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새정치 어쩌고 하는 미사여구를 빨리 집어치우고 단일화부터 서둘러라'는 박동천 선생의 말은 상당부분 진실을 꿰뚫고 있었던 셈이다.

일주일 전 박근혜 후보의 말 중에 부인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후보 등록 며칠을 앞두고도 누가 후보가 될지 모르는 것이 지금 야권의 현실이다. 참으로 한심한 정치가 아닌가'

수 년 동안 즉석 인터뷰 10분을 들을 수 없는 여당의 후보와, 단일화 며칠 전에야 처음으로 국민 앞에서 공개 토론하는 야당 후보들을 놓고 정치개혁을 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요컨대, 작금의 이 상황은 단지 누가 잘했네 못했네를 따질 상황만은 아닌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한국정치의 근본적이고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한, 정치개혁이든 혁신이든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들도, 정치학자들도 반성해야 할 문제다. 물론 대선이 끝나고 나면 정치인들은 다 잊어버릴 텐데, 정치학자들까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 아, 투표시간 연장 문제도.


#단일화#문재인#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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