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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표지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표지
ⓒ 폴리테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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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인민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한 부분이다. 그는 선거제도가 귀족정에나 어울릴 법한 방식이라고 여겼다. 슘페터도 "서로 다른 엘리트들이 정치적 영역에서 유권자 대중의 지지를 놓고 겨루는 경쟁"이라며, 비슷한 맥락에서 선거제도를 비판한다. 선거과정에 있어서 기득권층이 누리는 절대적 우위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기존에 지닌 정치적 자산(돈이나 명성)의 격차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서 대표자를 뽑고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구조다. 문제는 선출된 대표자들이 공공의 정치적 소망을 외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두 사람이 선거제도를 비판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선출된 권력이 다수의 시민이 아닌 특권계층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할 때의 폐해를 우려한 것이다.

루소와 슘페터의 지적을 우리 정치에서 되짚어보자. 총선과 대선을 함께 치르는 올해에도 유권자를 향한 정치인의 구애는 뜨겁다. 선거기간동안에는 모두가 공공의 대변자를 자청한다. 우리 사회를 개선시키겠다는 공약들이 쏟아지고 언제나 시민의 곁에서 함께하겠다는 외침도 우렁차다.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도 정치권의 모습은 여전할까.

특임장관실이 2010년에 시행한 국가기관 신뢰도 조사결과는 이러한 물음에 부정적이다. 국회(2.9%), 청와대(3.4%)가 신뢰도에서 꼴찌를 다툰다. 즉 한국정치는 시민에게 신뢰를 잃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염증도 이를 증명한다. 선거가 끝나면 '선출된 군림자'로 돌변하는 정치권의 행태를 자주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기간의 요란함도 한낱 구호에 그치기 일쑤다. 루소와 슘페터의 우려는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노동과 유리된 우리 민주주의의 풍경

한국의 전체 유권자는 4000만 명 수준이며, 그 중에서 1600만 명은 임금 노동자다. 노동자 계층이 한국정치에서 최대 지분을 지녔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주주의가 건강하다면, 정치는 노동자를 향해야 옳다. 그러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그려낸 우리 정치의 풍경은 그렇지 못하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폴리테이아 펴냄)은 최 교수가 <경향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엮은 책이다. 2011년 8월부터 10개월간, 새벽노동시장부터 현대자동차 공장까지 온갖 노동현장을 찾은 저자의 발걸음을 주춧돌 삼았다. 책은 한국정치가 왜 시민에게 신뢰받고 있지 못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노동현장에서 정치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시민이 민주주의의 근간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시민의 열망이 제대로 된 정치를 통해서 정책이란 이름으로 구체화될 때, 민주주의의 이상은 실현된다. 그러나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해주고 자신들을 위해 유익한 정책을 만들고 실현해주는 정치·정치인·정당 같은 것은 기대하지도 상상하지도 않는" 민주주의와 유리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민주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치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처입고 소외받은 사람들은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상징과 다름없다.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 그들은 일용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봉제 공장의 노동자이며, 재래시장의 상인, 절망에 빠진 농민, 지방대 대학생이고, 청년유니온의 조합원, 이주노동자, 신용불량자이기도하다. 즉 '우리'의 다른 이름들이다.

노동의 시민권이 노사 관계와 정당 체제에서 취약해질 때 그것의 부정적 효과는 사회 전반의 공동체적 결속을 해체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 노동이 배제되면 노동자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주요 이익 모두가 배제된다는 것,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여기에 있다. -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서문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지 못한, 민주정부 10년-한국 정당

저자는 우리 민주주의가 그 내용에 있어 공허한 이유로 절대다수 노동인구의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 위협받음을 꼽는다. 김대중-노무현의 민주정부 10년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전면적 확대로 귀결되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우리가 권위주위와 싸우면서 민주화에 걸었던 가장 큰 기대는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가 이뤄지는 사회"였지만, 노동문제에 대한 민주정부의 인식과 정책적 실천이 어긋났다는 것이다.

시민의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이 의제화되지 못함으로써 지금의 정치현실을 불러왔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때문에 사회의 중대 이슈를 의제에서 배제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은 물론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로부터 멀어졌다는 지적이다. 낮은 투표율로 대표되는 정치염증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리 중의 권리'라는 정치참여의 권리는 시민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정당이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이어진다. 특히 노동자를 대변해야 할 진보 정당의 '실질적인 부재'를 역설한다.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정부로 투입하는 통로이자, 정부의 정책 결정이 사회로 전달되는 정치의 조직망으로서 정당의 역할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날카롭다.

실제로 저자의 설명처럼, 우리정치에서 어떤 대통령도 정당을 통한 정치를 실현한 적이 없다. 자의든 타의든 정당으로부터 멀어졌다. '대통령 사인 정부'로의 전락이다. 결과적으로 "일정한 정치적 자원을 가진 여러 명의 개인과 세력이 각각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파당들의 느슨한 집합체"가 한국 정당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진보 정당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저자는 "안티테제를 말하는 데 그쳤던 것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가져온 무책임한 관성적 결과물"이라며, 진보 정당이 지닌 그간의 한계를 지적한다. 관념적인 구호에만 매몰되어 대안적인 정책을 실현시킬 만한 역량을 키우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민권'의 확립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시장으로부터 소외된 시민이 늘어났다. 저자가 만난 노동현장의 평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시장으로부터의 소외가 곧바로 정치 참여의 배제로 이어지는 형태의 일반화다. 이는 슘페터의 우려처럼 민주주의를 '정치 엘리트간의 경쟁'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영국의 정치학자 콜린 크라우치의 '긍정적·적극적 시민권' 개념을 소개하며, 시민의 변화도 촉구한다. 단순히 비판과 불평을 중심으로 하는 '부정적 시민권'을 넘어서라는 조언이다. "특정 집단이나 조직들이 스스로 집합적 아이덴티티를 발전시키고, 집합적 이익을 공유하면서 정부 정책에 자신들의 요구를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독자적으로 형성"할 필요성이 강조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현실이라면, 이를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논의는 그것이 어떤 차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시민논의의 공적 장으로 올리고, 정치권에 대응해서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해야만 '새로운 시민권'이 확립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복지 분야에서도 다르지 않다. 저자는 시민의 사회적 권리로서의 복지권 부여를 말한다. 수혜의 공급 측면에 초점을 두지 말고, 효과적 수요와 적극적 기회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복지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전자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복지 수혜자의 사회적 권리가 약화되고,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내용이 퇴보했다는 지적도 덧붙인다.

민주주의를 향한, 노학자의 기대가 어긋나지 않길

우리가 민주주의를 군부 권위주의라든가, 군주정·귀족정 같은 다른 경쟁적인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체제보다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 개선을 포함하는 시민권을 확대하고 실현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140쪽

이러한 민주주의 가능성은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려운 과정을 거쳐 가면서까지 민주주의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저자가 우리 민주주의와 정치, 정당을 매섭게 비판하지만, 여전히 기대를 잃지 않는 이유이기도하다.

또한 저자는 현재의 젊은 세대의 모습에서도 희망을 발견한다. 청년유니온 같은 새로운 시도들이 노동문제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이다. 지방대 학생들과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 정치의 염증에서 비롯된 '안철수 열풍'에 공감하면서도, 민주주의와 정당의 가치를 외면하지 않는 20대의 정치감각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지난 10월 31일, 출판사에서 주최한 '저자와의 대화'에서도 이러한 기대와 희망은 여전하다. 저자는 책에서 제시한 문제의 해답으로 "자신의 권익을 자신의 목소리로 주장해야 한다"며, 청년유니온을 모범적 사례로 꼽았다. 대선을 앞두고, 단일화나 NLL문제 등을 의제화하려는 정치권에 맞서 적극적으로 정책대결을 주문해야 한다는 것이다.(관련기사 : 최장집 교수 책이 '말랑말랑'해진 까닭은?)

칠순을 맞은 노학자는 민주주의와 정치, 정당을 향한 좌절에서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을 썼노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민주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을 조직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시킬 정치체제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기대는 우리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팔순을 맞이했을 때, 지난 10년을 민주주의의 가치가 바로 선 기간으로 회고하길 소망해본다.

덧붙이는 글 |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씀, 폴리테이아 펴냄, 2012년 10월, 1만 원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 후마니타스(2013)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민주주의#최장집#노동#한국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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