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하던 신입생의 행복한 미소는 현실이라는 벽 앞에 금방 사그라들게 마련이다. 비싼 대학 등록금도 문제지만, 지방 소도시에 사는 학생이 유학이라는 것을 가게 되면 먹고, 자는 것이 어려워 이중고를 겪게 된다.

그래서인가. 해마다 2월이 되면 대학가에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그도 어려울 경우는 홀로 방을 알아보고 다니는 새내기 대학생들이 눈에 많이 띈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라면 사정은 그보다 낫겠지만,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많은 학생들의 사정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자취생들이 세들어 살고있는 빌라들.
자취생들이 세들어 살고있는 빌라들. ⓒ 변지윤

나 역시 순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에 선생님을 꿈꾸며 국립 공주대를 선택했다. 사립대학 1/3 정도의 대학등록금은 여기저기서 구하면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집이 문제였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결과, 보증금 조금에 월세를 내는 형식의 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가격은 내 가정형편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렇게 2월은 대학에 합격했다는 기쁨보다 대학 등록금보다 더 비싼 집을 어떻게 구할 것인지에 대해 걱정이 앞선 시기였다.

집에서 컴퓨터로만 알아보는 데 한계가 있어 인터넷 정보를 A4 5장으로 갈무리하여 공주대학교로 향했다. 손에는 왕복 기차표와 점심값,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한 용돈을 합쳐 3만 5000원 가량이 있었다. 가방에는 월세 정보가 가득 담긴 종이와 기차에서 읽을 만한 책 한 권을 들고 갔다.

2002년 공주의 2월은 유난히도 추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학가에는 집을 얻을 곳이 참 많았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많은 원룸을 본 것은 공주에서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집들은 나의 집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 아버지 차를 타고 원룸을 둘러보는 친구들은 금세 계약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이야기지만 집은 눈에 차지 않은 집부터 봐야 하는 것이 진리다. 돈은 없는데 나도 모르게 좋은 집부터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후 2시까지 둘러보니 배가 고프고, 발이 너무 시렸다.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사 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달랬다. 그리고 이제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세 정보를 갈무리했던 종이의 마지막 페이지에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12만 원인 집이 눈에 들어왔다. 전화를 하고, 처음 와서 모르는 길과 떨어지는 눈을 벗삼아 내 집이 될 것만 같은 곳을 향했다.

집을 둘러보니 80~90년대 드라마에서 나오는 자취집 같았다. 방 한 칸에 공동화장실, 공동취사장이 있었다. 바퀴벌레와 함께 자야만 할 것 같은 곳이었다. 나의 꽃 같은 대학 신입생 시절을 이곳에서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렇게 어느새 월세 정보를 갈무리한 종이 마지막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오후 4시 40분, 막차는 6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둘러 계약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집을 빨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지막 집,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13만 원이었다. 가격순으로 정렬했는데 마지막은 정렬이 안 되었던 것 같다. 이 집은 내가 원하던 집이었다. 화장실이 붙어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너무 완벽한데, 가격까지 저렴했다. 더 볼 것도 없이 바로 계약을 했다. 어머니가 급하게 보증금 10만 원을 계좌이체하고 계약은 완료됐다. 계약을 완료하고 차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집을 더 둘러보지 못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위해 아르바이트와 틈틈이 독서를 하며 3월을 기다렸고, 꿈같은 3월은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신발장도 없이 방에 신문지를 깔고 신발을 놓아야 했지만 화장실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화장실에서 생긴 것이다.

꿈같은 자취방, 그 안에 갇힐 줄이야

4월의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따라 늦잠을 잤고, 2교시 수업을 위해 서둘러야 했다. 옷을 다 벗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은 나 혼자 서 있으면 더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었기에 항상 옷을 다 벗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몸을 씻고 화장실을 나서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상했다. 생각해 보니 평상시에는 항상 화장실 문을 닫지 않고 씻었다. 화장실 문에 잠금장치도 없었다. 잠금장치는 방에서 화장실로 들어가는 문 방향에 있었던 것이다. 이게 왜 그럴까? 따질 겨를이 없었다. 4월의 아침 날씨는 생각보다 추웠고, 수건도 화장실 밖, 문고리에 걸려있는 상태였다.

일단 몸에서 반응을 했다. 추웠다. 따뜻한 물을 계속 몸에 적셨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일단 이곳에 갇혔다는 공포감에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단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화장실 창은 생각보다 높은 곳에 위치했다. 변기를 밟고 올라서야 내 눈높이로 왔다. 물론 내가 키가 작은 탓도 있다. 방충망은 고정식이었다.

주먹으로 방충망을 뚫어보려 했다. 공연히 피만 났다. 화장지로 피를 닦고, 얼굴로 방충망을 밀어보았다. 방충망 하나만큼은 튼튼하게 설치한 집이었다. 그 때부터 공포감은 더욱 심했다. 일단 살려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 집은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집이었다. 오전 시간에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싼 가격으로 집을 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추위는 점점 더해왔다. 일단 화장실에 있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몸에 감았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변기를 밟고 다시 올라가 살려달라고 외쳤다. 2시간여를 살려달라고 외친 후에야 어떤 여학생이 다가왔다. 그 여학생에게 이래저래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날 미친 놈쯤으로 생각했었나 보다. 달음질치며 도망갔다. 그 후 10분 뒤쯤 한 남학생이 사정을 듣고 바로 옆에 주인집으로 가서 상황 설명을 한 뒤에야 주인아저씨께서 오셨다.

주인집 아저씨는 문을 열어주고 그냥 가셨다. 나중에서야 들었지만 아저씨가 급하게 원룸을 내어놓기 위해서 집 옆 공터에 화장실을 지어 붙인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도 화장실에 갈 때 문을 열어놓고 다니는 나쁜 습관은 대학교 1학년 때 생긴 화장실 트라우마 덕분이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



#원룸#세입자#새내기 대학생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