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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속에 묻혀 있던 관이 열린다. 어둠 속 주검이 형체를 드러낸다. 카메라는 두개골 오른쪽에 동그랗게 뻥 뚫린 구멍과 뼈가 함몰된 상흔을 비춘다.

장준하. 일제강점기 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1953년 월간 <사상계>를 창간한 언론인.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리며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선 정치인이다. 1975년 의문의 실족사로 세상을 등진 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숱하게 제기됐지만 지난 37년간 '진실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난 1일 밤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20년 만에 장준하 의문사를 재조명했다.
지난 1일 밤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20년 만에 장준하 의문사를 재조명했다. ⓒ SBS화면 갈무리

뻥 뚫린 구멍과 함몰 흔적 뚜렷한 두개골

지난 1일 에스비에스(SBS)의 시사다큐 <그것이 알고 싶다>는 장준하의 유골을 통해 진실의 문을 다시 흔들었다. 최근 조성된 장준하 추모공원으로 유해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검안이 이뤄진 게 계기였다. 사망 당시엔 검안이 치밀하게 이뤄지지 못한 채 서둘러 매장됐기 때문에 사실상 최초의 정밀검안이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두개골의 오른쪽 귀부분 뒤로 지름 6cm 가량의 선명한 구멍과 함몰 흔적이 발견됐다. '둔기로 가격당한 듯한 상흔'이라는 전문가의 설명이 뒤따랐다.

사실 제작진은 약 20년 전인 1993년에 이 문제를 이미 다룬 일이 있다. 1992년 창사한 SBS는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의문이 남은 미제 사건과 학원비리, 종교비리 등 민감한 사회문제들을 파헤쳤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듬해 3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방송이 '재야인사 장준하의 죽음-암살인가 실족사인가'였다.

당시 제작진은 장준하를 검안한 의사 조철구씨와 사건현장을 조사한 군 조사관 오영씨의 증언, 가족과 동료 등의 정황진술을 덧붙여 사건 전후를 재구성했다. 베일에 가려졌던 사건이 공중파라는 논의의 장으로 나오자 시청자들도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6cm 둥근 함몰 흔적이 발견된 장준하 두개골과 일반 추락사 시 발생하는 두개골의 형태차이.
6cm 둥근 함몰 흔적이 발견된 장준하 두개골과 일반 추락사 시 발생하는 두개골의 형태차이. ⓒ SBS화면 갈무리

불충분한 증거와 가설로 공격받았던 1993년 방송

하지만 당시 방송은 '의문사'에 대한 결정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관련자들의 증언과 정황증거만을 가지고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월간조선> 등 보수언론이 반박했고, 이어진 논란 속에 진실은 흐려졌다.

약 20년 후, 장준하를 다시 찾은 제작진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현장의 지형지물을 고려한 실험을 진행하는가 하면 더 많은 관련자를 대상으로 증언을 수집하고 당시 상황을 복원했다.

먼저 법의학자 88명에게 설문을 돌리고 이 중 29명으로부터 유골의 사망원인에 대한 의견을 수집했다. 법의학자들이 제시한 두개골 상흔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둔기로 맞았거나 추락시 정확히 둥근 상처를 남길 돌에 부딪히거나.

제작진은 발견 당시 사체에 있었던 주사바늘 자국과 골절의 상태 등을 종합할 때 '선 의식불명 후 타격, 그리고 추락사'로 결론을 냈다. 누군가에 의해 독극물이나 마취제로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둔기로 후두부를 강타당한 뒤 절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해외 법의학자는 유골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후두부를 강타당해 추락사 한 것으로 추정했다.
해외 법의학자는 유골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후두부를 강타당해 추락사 한 것으로 추정했다. ⓒ SBS화면 갈무리

제작진은 당시 장준하와 동행했고, '추락사'를 신고했던 김용환씨의 주장에 의문이 많다며 전문가와 함께 현장을 찾았다. 70도 이상의 급경사가 있는 길인데도 장준하가 무리하게 하산길로 택했다는 증언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지들은 등산을 즐겼던 고인이 평소 무엇보다도 안전을 중시했다고 증언했다.

제작진과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현장을 찾은 전문산악인들은 '우리도 등반장비와 안전띠가 없으면 엄두를 못 낼 길'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장준하가 실족, 추락한 후 이 절벽을 한달음에 뛰어내려와 이동파출소에 신고했다는 김용환씨의 진술도 설득력을 잃었다.

제작진은 사건 당시 유일한 동행자인 김용환씨가 계속 정황과 증거에 어긋나는 주장을 고집하고 국가정보원과 보안사 등 국가기관들이 사건 당시의 관련자료 제공을 거부하고 있어 이번에도 '확증'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20여년의 세월을 이어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보여준 이 방송을 계기로 사건의 실체는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최근 장준하 유족은 청와대에 사인규명을 위한 재조사를 요구했다. 또 민간차원의 '의문사 범국민진상조사규명위원회'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전문산악인들은 급경사 등반로를 보고 '등반장비와 안전띠가 없으면 엄두를 못 낼 길’이라고 말했다.
전문산악인들은 급경사 등반로를 보고 '등반장비와 안전띠가 없으면 엄두를 못 낼 길’이라고 말했다. ⓒ SBS화면 갈무리

MBC·KBS 부진 속 돋보이는 SBS의 '파이팅'

진행자가 "방송을 앞두고 적지 않은 고민을 했다"고 밝혔듯,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사안을 SBS가 적극적으로 다룬 용기를 높이 살 만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문화방송(MBC)과 한국방송(KBS)이 공정방송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사회비판 기능을 크게 잃었다는 지적을 받는 가운데, 최근 SBS 뉴스와 시사프로그램들은 '파업현장에 출몰하는 용역깡패' 등 비판적 사안을 정면으로 다뤄 눈길을 모으고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도 한동안 자극적이고 선정적 소재로 비판받았지만 최근 다시 노동, 사회, 역사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20여 년 전 '신생 방송사의 가장 진취적인 프로그램'으로 평가받았던 <그것이 알고 싶다>가 긴 슬럼프를 지나 본궤도에 돌아 온 것을 계기로 '시들어가는 국내 탐사보도가 부활했으면' 하는 시청자의 기대도 커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장준하#그것이 알고 싶다#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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