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2011년 6월 12일 1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3시간 가량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머문 뒤 떠나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2011년 6월 12일 1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3시간 가량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머문 뒤 떠나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 윤성효

희망버스. 그 말을 처음 들은 지 한 해가 지났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 조선소에서 일만 하던 노동자들이 힘들고 아플 때 '품앗이' 하듯 전국에서 달려왔던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빨간조끼를 입은 운동권 노동자들이 아니라 주부, 대학생,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 남의 일처럼 여겨졌는데, 곧 내 일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힘을 보태겠다'며 달려온 것.

2011년 6월 11일. 첫 '희망버스'가 부산 영도에 도착한 날이다. 부산, 서울 등 곳곳에서 집회, 거리행진 등을 벌였던 한진중공업 해고자와 가족들이 지쳐갈 무렵 '희망버스'가 왔다.

기자는 한진중공업 조선소가 있는 부산 영도에 자주 드나들었다. 2003년 고 김주익 지회장(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이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당시에도 취재했다. 김주익·곽재규씨 장례 뒤, 그해 겨울 한진중공업 사측은 기자한테 사보에 실을 글을 써달라고 했다. '사장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가보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글을 써 보냈고, 그것이 사보에 실리기도 했다.

회사에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2010년 말부터 한진중공업에서 다시 구조조정으로 노사 갈등이 불거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1차 희망버스... '담쟁이'처럼 담을 올라간 사람들

 2011년 6월 12일 1차 희망버스. 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 시인이 이날 오후 3시경 한진중공업을 나오면서 조합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11년 6월 12일 1차 희망버스. 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 시인이 이날 오후 3시경 한진중공업을 나오면서 조합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윤성효

기자는 희망버스가 올 때마다 취재하며 지켜보았다. 지난해 6월 11일 저녁 영도 일대에서 벌어졌던 상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참가자들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여 걸었다. 촛불을 든 사람, 구호를 외치는 사람, 아이 손을 잡은 사람, 스크럼을 짠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한진중공업 사측은 공장 안팎에 용역경비를 세워 놓았다. 공장 정문·후문 모두 용역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당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하고, 해고자들은 공장 안에 있었지만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문정현 신부, 고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씨 등이 앞장섰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12일 오전 1시 30분경 영도조선소 앞 도로에 모여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불렀다. 순간 담벼락 넘어 사다리가 내려왔다. 공장 안에 있던 해고자들이 사다리를 준비한 것.

해고자들이 사다리를 준비할 것이라는 예측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경찰도 용역도 대응하지 못했다. 후에 전국금속노동조합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 간부는 "조합원들이 논의해 비밀리에 준비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머리가 하얀 어르신부터 여성들까지. 서로 손을 잡아 주거나 부축하면서, '담쟁이'처럼 담을 넘었다. 공장 안에서는 담을 넘어온 희망버스 참가자와 용역경비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그 현장을 본 기자들은 대부분 함께 담을 넘어가서 취재를 진행했다.

<오마이뉴스> 편집부를 통해 희망버스 현장에 '특별한' 한 사람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편집부가 강정민 시민기자에게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싸움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가족대책위 '아내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달라고 부탁한 것. 집회 현장 취재를 맡은 내게 강정민 시민기자가 현장에서 인터뷰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부터 희망버스를 함께 타고 왔다는 그를 현장에서 직접 만나볼 수는 없었다. 공장 출입문이 막혀 있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를 타고 공장으로 정신 없이 들어간 탓에 강정민 시민기자를 따로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밤인데다 충돌이 발생하는 현장에서, 그것도 여성이 혼자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밤을 꼬박 세웠다. 기자도 당시 일어나는 상황을 계속 추가해서 보도했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 집회는 처음이었다.

'희망버스 동행기' 쓴 시민기자 기소... 취재도 죄가 되나

 2011년 6월 12일 1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3시간 동안 크레인 아래에 머문 뒤 떠나면서 한진중공업 조합원 가족들과 뜨거운 작별을 나누었다.
2011년 6월 12일 1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3시간 동안 크레인 아래에 머문 뒤 떠나면서 한진중공업 조합원 가족들과 뜨거운 작별을 나누었다. ⓒ 윤성효


다음 날인 12일 오후 3시. 85호 크레인 아래는 눈물바다였다. 13시간 동안 해고자와 가족들과 함께 지낸 이들은 뜨거운 포옹을 한 뒤 헤어졌다.

그 뒤 강정민 시민기자가 쓴 "11개월 된 아기의 일상이 왜 이리 힘든 걸까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영도조선소 안에서 만난 11개월 된 아기 엄마(해고자 가족)를 인터뷰 한 내용이었다(기사보기). 그 기사를 읽고 나서야 강정민 시민기자가 무사히 취재를 마쳤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첫 희망버스가 다녀간 뒤, 경찰이 담을 넘어갔던 참가자들을 건조물침입 혐의로 조사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취재 목적으로 온 강정민 시민기자는 당연히 수사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정민 시민기자는 지난 2월, 벌금 2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검찰은 기자를 비롯해 현장에 있던 '하고 많은' 취재진들 가운데,  강정민 시민기자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만을 약식기소했다. 현장에서 기사를 써올린 그 수많은 기자들 가운데 왜 하필 이들만 기소한 것일까?

관련기사 : <"남편아, 미안해... 벌금 200만원 나왔어">

강정민 시민기자는 정식재판을 청구해 지금껏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지금껏 기자가 집회 취재를 이유로 기소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김남석 경남대 교수(언론학)는 시민기자의 취재활동도 공익성을 갖기 때문에 이를 당연히 인정해줘야 한다는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시위대와 동행한 것을 이유로 기자를 기소한다면 세상의 그 어느 기자가 집회 취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검찰의 억지에 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되는 이유다.


#희망버스#시민기자#한진중공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