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남북 이데올로기를 최초로 다룬 작품',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고민하는 지식인의 이야기', '광장-사회적 삶의 공간, 밀실-개인의 비밀스런 공간', '남한은 광장이 죽고 개인적인 밀실만 있는 곳, 북한은 밀실이 없고 공허한 광장만 있는 곳'.

최인훈의 <광장>을 이야기하면 공식처럼 튀어나오는 말들이다. 교과서에서도 일부분이 나왔고 대학 시험에도 어김없이 출제되는 작품이 이 작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기보다도 먼저 앞에 나온 이 부분을 외워야했고 그것이 <광장>의 전부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암기로만 받아들였다. 그 갈등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읽는 것보다 외우는 것이 중요했던 때였다.

<광장>은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 이명준이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은 타고르호를 타고 중립국인 인도로 가는 도중 바다에 투신 자살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이명준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인의 초라한 뒷모습을 보여준다.

'반공' 이 득세할 때 이데올로기를 다루다

아버지의 월북으로 남한에서 수사 기관의 고문을 받는 명준은 남한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을 한다. 하지만 북한 또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현실에 순응해야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는 포로가 되고 중립국을 택한다. 그러나 중립국에서 그가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가 생각한 중립국은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어깨 한 번 치는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뱃전에서 갈매기를 보게 되고 마침내 최후의 목적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목적지로 뛰어들고 말았다.

<광장>은 이처럼 남한과 북한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방황하는 한 인간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반공'의 목소리가 드높았던 그 시대에,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이 고뇌하는 빨치산을 그렸다고 해서 상영 금지까지 나올 정도로 '빨갱이'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되는 그 시대에 객관의 시각으로 바라본 남북한의 이데올로기를 정면에 내세운 <광장>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 됐을 것이다.

이명준은 왜 바다에 뛰어들었을까? 중립국에서 끝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왜 죽음을 택했을까? 앞에서 나는 그것을 '최후의 목적지'로 갔다고 표현했다. 그렇다. 이 소설의 중요한 부분을 교과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적이다!"

<광장>에는 이명준이 사랑한 두 여인이 나온다. 남한에서 만난 윤애와 북한에서 만난 은혜다. 그리고 소설은 이들의 육체 관계를 묘사한다. 특히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나누는 명준과 은혜의 관계는 '애정행각'이라기보다는 살아남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비춰진다.

이데올로기 속에서 방황하는 명준에게 유일한 삶의 해법은 바로 '사랑'이었을 것이다. 윤애와의 사랑, 그리고 은혜와의 사랑은 마치 그에게 없었던 어머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그렇기에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하나의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한 여인을 사랑하는 수컷'이고 싶었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그저 한 여자를 맘껏 사랑할 수 있는 수컷으로 남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낙동강 전쟁터에서 명준과 은혜는 중요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자신의 딸을 잉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은혜의 전사와 함께 산산히 무너지고 말았다. "김일성 동무가 고독해서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하는 명준. 그가 은혜에게 한 이 말이야말로 <광장>의 가장 큰 주제가 아니었을까?

"나라면 이런 내각 명령을 내리겠어. 무릇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삶을 사랑하는 의무를 진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적이며, 자본가의 개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다. 누구를 묻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 이렇게 말이야."

인간다운 세상, 낭만이 있는 세상을 향해

어떻게 보면 <광장>이야말로 '사랑 지상주의'를 내세운 작품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대책없는 '사랑 지상주의'가 나오니 고개를 갸웃거릴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최근에 쓴 글이 아니라 1960년에 씌여진 글이라면 한번쯤 새로운 생각을 해 볼만하다.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사람들의 정신은 피폐해져 있었다. 그러나 전후의 상황은 이런 사람들의 피폐한 정신을 달래주지는 못하고 도리어 독재 야욕과 이념 대립으로 시끌시끌하며 국민들을 더 혼란과 궁핍 속에 빠뜨리고 있었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물론 '생존'의 문제일 수 있겠지만 그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이웃간에도 등을 돌리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쟁 전의 인간다웠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당시의 문인들은 어떻게든 '인간다운', 사람의 생활을 찾고 싶어했고 그렇기에 사랑의 유토피아 속으로 빠져들어갔을 지도 모른다.

잘살고 못살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가는, 고통없이 낭만을 즐기는 자유로운 세계를 문인들은 꿈꿨던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현실 도피'라고 평가하려 해도 이들의 절박한 바람을 무시할 수 없다. 현실 인식 전혀 없어보이는 박인환의 '모던 스멜' 풍기는 시들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4.19를 겪으면서 시인 김수영은 참여시인으로 변신하고 김관식은 스스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다 떨어지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변신한 것도 결국은 '완전한 자유'를 꿈꿨기 때문이었다. 스타일만 변했지, 마음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최인훈도 어쩌면 그 완전한 자유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정녕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사랑'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자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명준은 갈매기를 보고 은혜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을 떠올렸을 것이고 그렇기에 망설임없이 그 갈매기를 따라갔을 것이다. 밀실과 광장 속에서 방황하던 이명준은 그렇게 불확실한 중립국이 아닌 완전한 자유 세계, 사랑의 세계로 떠났다.

최인훈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만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고 또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은 이데올로기보다 사랑이 우선이었음을...' 이명준의 투신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그를 살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중립국에서 사랑없이 살아가는 이명준의 모습은 더 큰 비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찾고 싶었던 사랑', 이것이 포인트다

<광장>은 이렇게 5,60년대 문인들이 그렸던 '슬픈 낭만'이 고스란히 담겨진 작품이다. 물론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방황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었다해도 <광장>은 상징적인 소설이 됐을 지도 모른다. 왜냐면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정면으로 내세운 최초의 소설'이니까.

하지만 상징을 떠나 이 소설이 지금도 우리에게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이데올로기라는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한반도에서 그 광풍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이라는, 시대를 초월한 믿음을 우리에게 선사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전쟁의 폭풍과 독재 치하의 피폐한 속에서 다시 찾고 싶었던 '사랑의 위대성'. 그것이야말로 <광장>의 중요한 포인트다.

덧붙이는 글 | <광장/구운몽>, 최인훈, 문학과 지성사, 1995

이기사는 IP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광장 / 구운몽

최인훈 지음, 문학과지성사(2014)


#광장#최인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솜씨는 비록 없지만, 끈기있게 글을 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하찮은 글을 통해서라도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로 아마 평생을 살아야할 듯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