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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시 동구에 위치한 광주극장. 광주극장의 얼굴인 영화 <어머니>의 손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광주시 동구에 위치한 광주극장. 광주극장의 얼굴인 영화 <어머니>의 손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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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 보려고 집을 나섰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뭐하냐."
"영화 보러 가."
"무슨 영화?"
"어머니."
"새로 나온 거야? 어디로?"
"광주극장."
"거긴 어디야. 새로 생긴 극장인가?"

1934년에 생긴 극장에서 개봉한 지 20여 일이 지난 영화를 봤다. 이 말은 '광주극장에 <어머니>를 보러 갔다'는 말과 같다.

영화 <어머니>를 알게 된 건 지난달 30일. <오마이뉴스> 노조에서 개봉 전에 미리 상영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다. 광주에 있어서 직접 참석하지 못했지만, 개봉하면 꼭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광주극장을 알게 된 건 2010년 4월. 송두율 교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 2>를 보러 갔을 때다. 이전에도 광주극장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영화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광주극장에 <어머니>를 보러 간 이유는 딱 하나다. 내가 사는 광주에서 <어머니>를 볼 수 있는 곳은 광주극장뿐이었으니까. 지난 5일 <어머니>가 개봉했다. 사는 데 치여 관심을 못 두다가 마음을 먹고 지난주 포털사이트에 '어머니'를 검색했다. 일반 영화와 달리 '상영관 정보'가 단출하다. 요새 많이 본다는 <건축학개론>을 검색해 보니, 상영관 정보에는 날짜와 지역까지 범주를 설정해도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했다. 반해 <어머니>는 날짜 범주만 설정해도 한눈에 전국 상영관 정보가 들어온다. 직관적으로 "광주서 볼 순 있는 걸까"는 생각이 드는 순간, 광주극장이 눈에 들어왔다.

"광주 '여행'하려면 광주극장으로..."

광주극장. 2010년 1학기 수강했던 한 수업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 극장을 소개했던 말이 생각났다.

"관광이 말 그대로 지역문화의 빛만을 보는 것이라면, 여행은 그곳 문화의 빛과 어둠을 체험하는 것이다. 나는 광주를 '여행'하고 싶은 손님에게 5·18 국립묘지와 광주극장을 소개한다."

광주극장은 단관극장이다. 우리가 흔히 가는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는 표를 사면 가장 먼저 '○관 ○관 ○층 ○열 ○번'을 봐야 하지만 광주극장은 그런 구조주의적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1관이 전부고, 2층에 걸친 862석의 규모지만 관객이 거의 없다. 필자가 <어머니>를 본 날도 관객은 두 명. 물론 필자를 포함해서다. 표를 끊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 원하는 자리에 앉으면 됐다.

앞서 말했듯 1934년 개관한 광주극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예술영화전용관이다. 개관 당시 광주에는 일본인이 설립한 극장뿐이었고, 일본 영화와 연극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광주극장은 창극을 주로 상영했다. 창극은 창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극을 말한다. 해방 이후에는 전남지역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식, 김구 선생의 강연회, 집회, 음악회 등이 열렸으며 야학도 운영됐다.

광주극장이 오래됐다는 것은 아직 남아 있는 '임검석(臨檢席)'을 통해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임검석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일본의 영화 검열이 시작된 이래 극장 내에 생긴 특별 좌석이다. 조선총독부에서 파견된 경찰관은 이곳에 앉아 당시 상영된 영화뿐 아니라 연극, 악극, 창극 공연을 수시로 현장에서 검열했다. '비위에 거슬리는 내용'이 나오면 경찰관은 주의와 함께 곧바로 호루라기를 불었으며, 공연 중 세 번 호루라기가 울면 공연을 중단해야 했다.

 광주극장에 남아 있는 임검석. 임검석은 일제강점기,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연극·악극·창극 등의 공연을 현장 검열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 좌석이다.
 광주극장에 남아 있는 임검석. 임검석은 일제강점기,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연극·악극·창극 등의 공연을 현장 검열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 좌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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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단관극장·손간판... 재정난에도 <어머니> 개봉

광주극장은 아직 '손으로 그린 간판'이 걸린다. 이 손간판은 광주극장의 얼굴이다. 특별한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손간판을 내걸고, 감독을 불러 관객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도 한다. 2010년 <경계도시 2> 때도 그랬고, 이번 <어머니> 때도 역시 손간판이 걸리고, 태준식 감독을 초청했다. 이번에 <어머니>를 보러 가서도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이소선 어머니'가 그려진 손간판이었다. 투박하지만 정겹다. 손간판 가운데에는 박승희 열사의 아버지인 박심배씨가 "어머님의 따뜻한 사랑이 그립습니다"라고 쓴 친필 글씨가 적혀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매표소가 있다. 단칸이다. 고개를 조금 숙여 매표소 직원에게 영화 제목을 말해야 한다. '좋은 관람 되십시오' 따위의 허식은 없다. 광주극장은 문화상품권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현금을 찾아간다. 물론 카드는 된다. 하지만 광주극장 찾을 때면 내 돈이 오롯이 이곳에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현금을 챙긴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광주극장은 재정적으로 어렵다. 대한민국에서 극장이 '성공'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하나는 전국 규모의 막대한 자본을 갖추지 못했고, 둘은 소위 말하는 상업영화는 거부하며, 셋은 극장 이름에 영어가 안 들어간다. 광주극장은 지난 1월 무등극장이 없어지면서 광주 유일의 향토자본 극장이 됐다. 더불어 대놓고 예술영화전용관을 자처하고, 요샌 보기 어려운 유형인 극장 이름에 '극장'이란 단어가 들어간다. 요샌 이런 '씨지브이(CGV)', '씨네마' 같은 게 성공하는 데 말이다.

<어머니>를 개봉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랐다.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돈 안 되는 <어머니>를 상영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광주극장에서 쉽게 개봉할 수 있을 만큼 극장개봉 비용이 만만한 것도 아니다. 지난 2월 전남대학교에서 광주지역 공동체상영회를 열어 자발적 모금을 유도했고, 이후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보태 개봉 비용을 마련했다. 손간판도 20여 년 간 이를 책임져 온 박태규 화백과 일반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들어졌다.

영화 시작 전, 1000원짜리 원두커피를 사 든 채 극장 한 바퀴를 돌아봤다. 어두컴컴하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극장 내부는 '나'를 어떤 시간으로든 옮겨 놓는다. '누런' 빛이 감도는 광주극장 안에 서 있으면 오래된 영상 안에 서 있는 나를 볼 수 있다. 때론 그 영상물에서 빠져나와 임의로 영상 속을 채워도 된다. 채워 넣는 것에 따라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을 연출할 수 있다. 오래된 공간이 가진 힘이다.

2층으로 올라 상영관 문을 열었다. 바로 커튼이 쳐져 있고, 곧이어 특유의 나무 썩는 냄새가 난다. 고요한 와중에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복층으로 되어 있는 상영관의 2층 맨 앞자리에 앉았다. 바로 앞에는 나무로 된 난간이 있다. 4월임에도 상영관 안은 쌀쌀하다. 광주극장에서 담요는 필수다. 매표소 옆에 관객을 위한 담요가 쌓여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필자의 유일한 동행인인 다른 한 관객은 바로 뒷줄 왼쪽 끝에 자리했다. <어머니>는 희로애락을 제공했다. 소소한 웃음과 함께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분노와 슬픔도 일게 했다. 사람이 워낙 없다 보니 이러한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외화(外化)된다. 그러다 문득 유일한 동행인인 그 관객의 흐느낌을 들었다. 갑자기 외화됐을 내 감정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 관객도 내 웃음과 흐느낌을 들었을까"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서나 쉽게 울고, 웃고 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

켜켜이 쌓인 추억, 들춰보는 즐거움

 광주극장에서 <어머니>를 보며 앉았던 2층 맨 앞줄 좌석.
 광주극장에서 <어머니>를 보며 앉았던 2층 맨 앞줄 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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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을 보는 게 예의라고 한다. 가끔 이 말을 비웃고 싶다. 관객에게 예의 없는 영화에 관객도 예를 갖출 필요가 있나. 온통 제작사, 배급사, 멀티플렉스 영화관 사이의 자본 관계에 신경이 쏠려있는 영화면 만들어진 과정은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광주극장에서 본 <어머니>는 영화가 끝나도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정말로 궁금해 엔딩크레딧을 뚫어져라 보게 된다.

"나 보고 힘 받는다 하면 바보다, 바보!"

<어머니>에서 가장 와 닿던 이소선 어머니의 대사. '열사의 어머니'이기보다 '노동자의 어머니'이기를 원했던 이소선 어머니에게 많은 이들은 힘을 얻었고, 지금도 얻고 있다. 그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이소선 어머니가 줄 수 없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무엇을 주는지 잘 몰랐던 모양이다. '광주극장에서 본 영화 <어머니>'는 나에게 가슴으로, 머리로 희로애락을 느끼게 했다.

이소선 어머니와 광주극장이 주는 힘은 이러한 것이다. "사는 데 힘을 좀 얻으려고 문화상품권도 안 되는 어두컴컴한 극장에 일부러 <어머니>를 보러왔다"고 말하면 이소선 어머니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때도 "바보"라고 한다면 기꺼이 바보가 되겠다.

 "광주극장에선 내가 갖고 잇지 않은 '추억'을 볼 수 있다."
 "광주극장에선 내가 갖고 잇지 않은 '추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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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교수가 광주극장을 '여행지'라 말했던 것은 "이곳이 광주와 오랜 시간 함께한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광주극장에서는 빛바랜 영화 포스터, 상영관 안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나무 썩는 냄새, 갈라진 의자와 책상 등에는 1934년부터 쌓여온 누군가의 추억이 쌓여 있다. 켜켜이 쌓여 있는 남의 추억을 상상해 보는 것, 광주극장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영화 <어머니>를 보고 광주극장에 추억 하나를 새겨 두고 왔다.


#광주극장#어머니#이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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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을 바라봅니다. extremes8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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