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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업중인 KBS새노조 최원정 아나운서와 MBC노조 문지애 아나운서 등 MBC,KBS,YTN 노조원들이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방송3사 공동파업 콘서트-방송 낙하산 퇴임 축하쇼'에서 무대에 올라 가수 YB의 노래 '흰수염고래'를 시민들과 함께 합창하고 있다.
파업중인 KBS새노조 최원정 아나운서와 MBC노조 문지애 아나운서 등 MBC,KBS,YTN 노조원들이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방송3사 공동파업 콘서트-방송 낙하산 퇴임 축하쇼'에서 무대에 올라 가수 YB의 노래 '흰수염고래'를 시민들과 함께 합창하고 있다. ⓒ 유성호

지난 16일 밤, '방송 낙하산 사장 동반 퇴임 축하쇼'가 열리는 서울 여의도 공원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수구 정권이 심어놓은 사장과 그 친위세력에 의해 박탈당한 언론의 자유와 제작의 자율성을 되찾기 위해 파업  중인 4개 언론사(MBC·YTN·KBS·연합뉴스) 그리고 두 달 넘게 유령 같은 경영진과 싸우는 <국민일보> 등 모두 5개 언론사 기자·피디· 아나운서들이 시민들과 함께 빗속에서 '파업 잔치'를 벌였다.

언론사 '파업 연대'가 '잔치'인 까닭

이날 모임이 '잔치'인 까닭은, 우선 그 이름부터 '낙하산 사장 동반 퇴임 축하쇼'인 탓이다. 지금 굳세게 사장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동반 퇴임 축하쇼'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저항 중인 기자·피디·아나운서들의 가슴과 머리 속에 그들은 더 이상 사장이 아니고, 해직·정직 등의 칼을 마구 휘두르는 망나니와 다름없으니, 이미 유령 같은 존재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으면 몽땅 그만두게 되어 있다. 겨울이 되면 나뭇잎이 죄다 떨어지는 게 자연의 이치다. 새 봄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 날 여의도 밤 모임이 '잔치'였던 또 다른 이유는 그 굵은 빗방울 속에서도 그치지 않았던 신명과 웃음, 생기발랄함 때문이다. 방송사 기자·피디·아나운서답게 그들은 번뜩이는 재능으로, 마치 촛불시위 때처럼, 그렇게 신명나는 저항의 잔치판을 벌였다. 그 잔치판에 나온 많은 연예인·가수·<나꼼수> 등도 저마다 잔치판의 흥을 돋우었다.

그 잔치의 끝 무렵, 나도 분에 넘치는 박수를 받으며 무대 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 정권 출범 뒤 해직의 고통을 받고 있는 노종면 YTN 전 노조위원장, 이근행 MBC 전 노조위원장, 그리고 6개월 정직처분을 받은 엄경철 전 KBS 새노조 위원장, <국민일보> 경영진으로부터 해고된 조상운 국민일보 노조위원장, 파업대열에 동참하는 공병설 연합뉴스 노조위원장을 무대 위로 소개했다.

무대 위에서 빗발이 흩뿌리는 앞을 내려다보니, 하얀 우비를 입은 수많은 시민과 눈에 익은 방송사 후배들 얼굴이 보였다. 분명 신명나는 '잔치'임이 분명한데, 그러나 가슴이 저려왔다. 저들은 왜 천직으로 알면서 사랑해 온  방송 마이크와 제작 현장을 떠나 이 빗발치는 여의도 벌판에 서 있는가. 그들을 제작 현장에서 내쫓아낸 무리들의 그 못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무대 위에서 빗발 쏟아지는 아래쪽을 내려다 보고 있으니, 문득 3년 9개월 전의 일과 그 즈음 KBS 사내게시판에 올랐던 글 한 편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힘없는 슬픔'

3년 9개월 전, 그러니까 강제 해임 두 달 전 쯤인 2008년 6월, 나의 강제 해임을 앞두고 KBS 안팎은 난장판이었다. KBS 내부는 나의 퇴진에 올인한 KBS 노조(옛 노조)를 비롯하여 새로운 권력이 된 이명박 세력(과 그들의 뿌리인 수구세력)을 추종하는 이들이 노골적으로, 집단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그들이 지금 KBS의 집권세력이다. KBS만이 아니라 대부분 방송사와 연합뉴스가 그렇다). 그리고 KBS 이사회는 친 이명박 세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KBS 바깥은 청와대·검찰·감사원·방송통신위원회·국세청·교육부 등 권력기관이 총출동하여 나의 목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바로 이즘, 사내 게시판에 엄민형 피디가 쓴 '힘없는 슬픔'이라는 글이 올랐다. 글은 조선조 500년 역사를, 왕의 권력과 이를 견제하려는 사림파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보면서 KBS 사장의 입지를 조선의 왕과 비슷한 처지로 비유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해진 사장의 임기와, 전 사원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그래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집단적 이해를 중심으로 조직화되고 복잡하게 작동하는 사원 집단, (특히) 정권의 변화에 따라 연동되어 작동하는 사내 세력집단의 권력 투쟁 등에 의해 심하게 견제를 당하고 있는" 점 등이 조선 왕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팀제 등 나의 KBS 개혁조치와 과정을 "마치 정조가 조광조를 등용하여 개혁과 왕권 강화를 도모했듯이 노조 출신을 포함해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젊은 사람들을 팀장으로 배치하고 조직을 운영했"다고 보았다. 그러고는 바로 이런 점이 "당연히 그동안 오랜 세월 고착되었던 구조에 익숙했던 사내 다수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정황"이라고 평가했다.

삼전도 굴욕과 KBS, 그리고 권력의 친위대들

내가 주목했던 '힘없는 슬픔'은 이런 내부의 평가가 아니었다. 글의 그 다음 부분, 즉 "중국의 왕조가 바뀌거나 황제가 바뀌는 등의 외연의 변화가 조선의 정치 지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것과 비슷하게 KBS 내부 권력 지형도 정권의 변화에 연동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풀어나간 대목이다. 그러면서 당시 KBS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치 명나라 말기를 지나 청나라가 중국을 장악하는 초기 상황과도 유사하다. 지금 KBS 사원들이 정연주 사장을 삼전도에 끌어내서 청나라 황제에게 목을 바치려고 등을 떠밀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당시 명나라에 끝까지 충성을 바치라고 고집을 부렸던 사람들이 현명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나, 김훈의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에서도 표현되었듯이, 힘이 없는 국가에서는 '명분의 힘'도, '실리의 힘'도 모두 헛된 '말의 다툼'에 불과한 것이다. 김훈은 촌철의 표현으로 압축한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그런데 더욱 비참한 것은 정연주 사장을 삼전도에 끌어내고, 친 이명박 대통령 인물 중에서 새로 사장을 맞아들인다고 하여 KBS가 안전해지고, 수익도 늘고, 발전하리라는 희망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나라 황제는 조선의 왕에게 정치적 굴복과 치욕을 준 데서 그치지 않고,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의 재물 약탈과 부녀자 공출, 살육을 자행했다.

안타깝게도 앞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피가 철철 흐를 앞길 역시 굴복과 희생양 제출만으로 막아질 것 같지 않다. KBS 역시 대선의 일등 공신인 특정 신문사, 대기업, 특정 종교집단 등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푸줏간에 내걸릴 많은 고기 덩어리 중의 특히 커다란 덩어리 하나라는 입장에서 별 다른 변화는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야권연대 위기 때 맨 먼저 떠오른 생각

 정연주 전 KBS 사장이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방송3사 공동파업 콘서트-방송 낙하산 퇴임 축하쇼'에 참석해 MBC, KBS, YTN 노조원들을 지지하며 격려하자 한 시민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방송3사 공동파업 콘서트-방송 낙하산 퇴임 축하쇼'에 참석해 MBC, KBS, YTN 노조원들을 지지하며 격려하자 한 시민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있다. ⓒ 유성호

내가 굳이 '힘없는 슬픔'을 길게 인용한 이유는 자명하다. 파업으로 온갖 고통을 치르고 있는 후배들을 생각하면서, 지금 권력과 수구세력의 편에 서서 후배들에게 온갖 못할 짓을 저지르고 있는 권력의 친위대를 청산·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힘없는 슬픔'은, 뒤집으면 '힘'을 얻어 그것으로 '정의'를 실현하자는 것일 터다. '힘'이 없으면, 김훈의 표현대로, '정의는 실천 불가능'하게 되고, '치욕은 실천 가능하게' 남는다.

야권연대가 위기로 치달았을 때,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렇게 공멸하면, 참 언론, 올바른 방송을 위해 싸워 온 저 후배들은 어찌 되는가, 생활인으로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해직을 선고받고, 정직·감봉의 중징계를 받고, 지방으로 유배 가고, 비제작 부서로 살처분되는, 저 후배들의 앞날은 어떻게 되며 그들의 복권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가, 저들을 이토록 혹독하게 징벌하는 권력 친위세력들의 오만한 웃음소리와 승리의 축배 소리가 계속 들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 맨 먼저 떠올랐다.

지금의 방송, 지금의 언론, 지금의 세상이 그냥 그대로 좋다고 여긴다면 세상 바꾸는 일에 적극 뛰어들 필요가 없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수구세력이 시멘트보다 강고하게 최소한 37%가 존재한다(다음 글에서 자세히 논하겠다).

그러나 지금의 방송, 지금의 언론, 지금의 세상이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이 역사과정에, 이 구체적인 정치과정에 적극 뛰어들어야 한다. 그게 지금의 시대적 사명이요, 역사적 책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 파업 중인 나의 사랑스러운 언론계 후배들의 앞날을 지켜주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연주#KBS#MBC#YTN#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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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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